제88회 신흥무관학교의 설립과 역사적 위상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1-06-15
조회: 2092
추천: 0
주제 :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역사적 위상
목차
1.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의 의의
2. 설립 배경:
[자막]
안녕하세요. 오늘 제88자 우당 역사문화 강좌를 맡게 된 수원대학교 사과에 있는 박환입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할 강의 내용은요. 신흥부관학교의 설립과 역사적 위상이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함께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것처럼 올해가 신흥부관학교 설립 110주년이죠. 그래서 특별히 신흥부관학교의 설립과 역사적 위상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상당히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서 이런 주제를 잡아 봤습니다. 신흥부관학교 하면 여러분 너무나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죠 만주 지역에서 동립군들을 양상해서 무장투쟁 상직으로서 그동안 가장 대표적인 무관학교로서 아마 여러분 잘 아실 겁니다. 특별히 2010년 일제위에서 조선이 강점된 이후에 만주라든가 러시아라든가 또는 미국에 네버라스카주에서 박용만이 또 미조한인 소녀명학교도 만들고 또 중국 본터라든가 수많은 지역에서 많은 무관학교가 10년에 만들어졌죠. 그 가운데서도 만들어진 무관학교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이고 또 가장 많은 동립군을 양상했고 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런 무관학교가 바로 신흥부관학교죠. 그런 차원에서 신흥부관학교는 굉장히 역사적 의미가 있는 무관학교다라고 그렇게 말씀 드릴 수 있고 그 무관학교 신흥부관학교의 설립이 올해 110 년이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흥부관학교는 다른 무관학교와 무관학교로서는 같은 역사적 의미를 갖지만 특별히 신흥부관학교 같은 경우는 바로 이러한 어떤 공화주의 계열에 동립군을 양성했다라는 측면에서 사실은 또 굉장히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희가 청구 10년에 날아가 막아지 않았습니까 날아가 막았는데 바로 이러한 청구 10년 대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아직까지 조선왕조를 제건하자 라고 하는 우리가 그리들 전문적인 용어로서요. 그것을 복벽주의라고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복벽주의 즉 임금을 다시 회복하는 복벽주의라는 조선왕조를 제건하자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바로 의병투쟁을 전개이 된다. 그런 사람이 많았던 시절이 아직까지는 청구 10년 됩니다. 그런데 바로 신흥부관학교는 신민회. 신뢰는 단차 잘 아시죠. 구암만에 만들어진 신민회 같은 경우에 해외 독립운동기지를 만들어서 해외 독립운동기지를 만들어서 바로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바로 이러한 공화주의 계열 공화주의 계열에 독립군을 양성하자 라고 해서 만들어진 무관학교가 바로 신흥부관학교다. 따라서 신흥부관학교는 청구 11년 에 바로 중국에서 공화주의 혁명이 일어나죠. 여러분 잘 아시는 분과 같이 그것이 바로 신혜혁명 아닙니까 신혜혁명 인데 신혜혁명에 바로 신흥부관학교 즉 신구관학교 세력들 또 신민회 세력들이 만족적이 맞는 것이 뭡니까 바로 경악사라든가 이런 단체를 만들지 않습니까. 바로 1911년에 신흥부관학교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국이 다시 해방됐을 때는 공화주의 민주 공화주의 국가를 만들어야 겠다 라는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바로 신혜혁명 신혜혁명에도 참가를 했다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즉 신혜혁명에 참가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의미가 크다. 그러면 만주지역 유하여 사문부에서 신흥부관학교를 만들었는데 이 사람들이 그러면 어떻게 신혜혁명 에 참가했는가. 조선 민족혁명당의 기관지가 앞길이라는 게 있습니다. 조선 민족혁명당은 1930년대에 김호은봉이라든가 이런 신흥부관학교를 출신들이 만든 또 다른 조직이 되겠습니다. 김호은봉 윤기석 이런 사람들이 만든 조선 민족혁명당의 기관지 앞길 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 앞길의 기록을 보면 신흥부관학교를 만들었던 세력들이 바로 유하 연 사문부 지역에 있는 유하연의 그런 어떤 관리들이 있는 집행기관 유하연 공소 라고 표현하는데요. 그 공소를 공격했다. 그러면서 신혜혁명에 참가했다라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이처럼 신흥부관학교를 신민혜의 무장 투쟁기지 건설 계획에 따라서 만들어줬고 그리고 이러한 신흥부관학교를 바로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복급 주의 계열의 어떤 그런 독립군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공화주의 계열 국민이 바로 주인이다 라고 하는 그런 국가건설의 주인공이 바로 일반 국민이다라고 하는 민주공화제를 주장했다는 거죠. 따라서 신흥부관학교에서 배출했던 그런 독립군들이 바로 공화주의 계열 에 독립군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공화주의 계열의 독립 군들. 이러한 정신 자세와 무장을 했던 그런 독립군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바로 해방 후에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 을 만드는데도 바로 신흥부관학교들이 정신적 사상적으로 철저하게 기여를 했다라고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1990년대 바로 신흥부관학교가 만들어졌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1911년에 신흥부관학교가 6월 11일 여름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신흥부관학교는 1919년 3일 운동을 거쳐서 1920년 청산니 봉후정전투에 많은 대원들이 참여했고 그럼으로써 결국 신흥부관학교 는 1920년 정도의 폐교가 됐습니다. 그런 가운데 만주 지역에서 신흥부관학교 생도들로 졸업생들이 약 3,500명 정도의 신흥부관학교 생도들이 졸업을 했다라고 이렇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들 신흥부관학교 졸업생들이 바로 만주 지역에서 신흥부관학교에 있었던 만주 지역에서 수많은 항일 독립전쟁 에 가장 주추적인 역할을 했다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죠. 1920년 가까이는 봉후정전투 또 1920년 10월에 있었던 청산니 전투 또 1930 년대 만주에서 있었던 왕청연회에서 있었던 대전자령전투 등 수많은 큰 전투 그리고 소규모의 수많은 전투 에 있어서도 독립군의 장교로서 큰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어느 무관학교 출신들이냐 바로 신흥부관학교 출신들이 그러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즉 신흥부관학교는 바로 8.15 우리가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전쟁의 주도 세력으로서 굉장히 큰 역할을 했다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죠. 지금 저는 이제 봉후정전투 청산니 또는 대전자령전투 이런 것들만 말씀을 드렸는데 사실은 신흥부관학교 출신들은 만주에서만 활동한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은 러시아에서도 활동 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도 항일투쟁에 있어서 수많은 전투 이만전투 올루가전투 또는 볼러타이프카 전투 등 수많은 전투들이 있는데 이때도 신흥부관학교 출신들이 많은 활동을 했고요. 또 여러분 잘 아시는 분과 같이 중국 본토에서도 우열땅이라든가 김원봉 을 밀어뜬 우열땅 뿐만 아니라 조선우영대 또는 조선우영군 즉 중국 본토 지역에서도 많은 활동을 했고 특별히는 여러분 너무나 잘 아시는 1940년에 충칭해서 조직된 광복군 광복군의 주역도 누구였습니까 바로 신흥부관학교생도들이었죠. 그렇죠 따라서 광복군에 있어서 도 신흥부관학교생도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즉 8.15 해방까지 독립전쟁 자화 우를 막년하고 독립전쟁의 주도 세력을 형성했던 것이 바로 신흥부관학교생도들이다 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도 또 신흥부관학교를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인 의미를 갖죠. 그런데 신흥부관학교생도들을 교육 시킨 사람들이 누구냐 바로 이 교육 시킨 사람들이 바로 대한대국 에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또 제한 제국의 군인 또는 제한 제국의 장교석 활동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1010 년 일제위에서 조선이 강점된 이후 만주로 막명해서 신흥부관학교에 교관이 됐습니다. 즉 신흥부관학교생도들은 대한대국의 정통성을 엿하던 그러한 대한대국 의 장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그 신흥부관학교생도들이 바로 독립군의 주역이 됐고 광복군 이 주역이 됐고 또 정신사적으로 국군의 주역이 됐다 라고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 측면에서도 바로 한국의 우리 역사의 전통적 국내을 개승한 것이 바로 뭐냐 바로 신흥부관학교다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죠. 이런 의미에서 신흥부관학교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는 그러한 무관학교 다라고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한 신흥부관학교. 2011년 6월 딸에 만들어졌습니다. 올해 지금 현재 2021년이죠. 6월입니다. 그렇죠 여러분 신흥부관학교 올해 설립 110주년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신흥부관학교에 구체적인 내용 아마 여러분 많이 아실 겁니다. 저와 함께 신흥부관학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대책임하면서 신흥부관학교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오늘 갖도록 하겠습니다. 신흥부관학교 그럼 설립배경은 뭐냐 그렇죠 신흥부관학교 어떻게 해서 이러한 만져벌판에 이렇게 유명한 대단한 역사적 위상을 갖고 있는 신흥부관학교가 만들어졌을까. 그것은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신민해에 해외 독립운동 기지건설 계획 에 따라서 바로 신흥부관학교가 만들어졌다 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신민해에 같은 경우는 구한 말을 만들어졌죠. 구한 말 1905년부터 1910년 사이. 그런데 일본에 의해서 우리가 1905년 에 을사조약 때문에 외교권을 뺏기고 그러면서 국권이 망실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면서 국내에서 더 이상 독립운동 국권회복운동을 하는 건 사실상 좀 어렵게 됐습니다. 그래서 뭔가 해외에 나가서 만주라든가 러시아라든가 미주라든가 해외 나가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그러면서 우리가 일본 제국지를 몰아 낼 수 있는 독립군을 양성해야 되겠다. 그런 계획에 따라서 그런 계획에 따라서 바로 신흥부관학교. 무관학교를 이제 만들게 됐고 그런 여러 무관학교들은 해외에서도 많이 만들어진 것이죠. 첫 번째 우선 말씀 드릴 수 있는 건 신흥부관학교 아닙니까 바로 유하연 사문부 라는 데입니다. 유하연 사문부 서관도 여기 서관도 어디 가. 서관도는 바로 암노강 건너를 우리는 서관도 라고 하고요. 두만강 건너를 일반적으로 북관도 라고 이야기합니다. 암노강 건너 이렇게 암노강이 있으면 여기 이제 신의주가 있지 않습니까 신의주 신의주 건너 이쪽 지역을 여기 단동이고 관전이고 집안이고 통화하고 통화 위쪽에 바로 유하연 이 있죠. 이쪽 지역 서관도 지역 이 서관도의 유하연 사문부의 신흥부관학교. 그 다음에 이쪽에 이제 북관도 지역이 있지 않습니까 해외 회령이라든가 종성이라든가 무산이라든가 등등 지역이 있는데 여기를 건너가면 이쪽 지역 두만강 건너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북관도 러 갑니다. 북관도 지역에서는 회령을 건너면 바로 사막이라는 데가 있죠. 사막 있고 사막에서 쭉 올라가면 오랑케보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저 고갤만 넘어가면 오랑케땅이라고 해서 이제 오랑케보계라고 했거든요. 동영에서 두만강을 건너가면 사막 사막에서 이렇게 언덕배지가 있는데 산 고개가 있는데 오랑케보계입니다. 거기 오랑케보계에서 밑으로 쭉 내려가면 바로 명동촌이 있습니다. 여러분 명동촌 그러면 윤동주 를 기억하시죠. 그 명동촌에 명동 학교가 있었고 이 명동 학교는 일반 학교와 더불어서 무관 학교적 성격도 역시 갖고 있었다 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고 또 이 북관도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이쪽에 중국이고 러시아지 않습니까 이거에 중국과 러시아에 걸쳐있는 큰 하나의 호수가 있습니다. 그거 호수가 바로 흔계호입니다. 흔계호인데 흔계호 옆에 붙어 있는 중국당 만주당에 있는 백백하게 산이 살림이 오고자 있다라고 해서 밀산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밀산 그 밀산의 한흥동 한국을 다시 일으키겠다라고 만든 한흥동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여기도 밀산 무관 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즉 서간도 북관도 북만주 이러한 만주지역 또는 멀리 미국에 네버라스카 주의의 박용만이 또 네버라스카 소년명 학교 또 만든다든가 이러한 또 러시아 같은 경우도요. 블라지보스톡에서 북방으로 100km 올라가면 우스 리스크가 있고 우스 리스크에서 한 또 100km 올라가면 이만 현재 지명은 날레네치엔스크 라고 하는데 그쪽에도 라블류라고 하는 지역에 무관 학교를 만들 려고 굉장히 또 노력을 했었습니다. 이처럼 이처럼 신민회 같은 경우는 나라가 망하면 바로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어야 되겠다 무관 학교를 만들어야 되겠다 그런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계획을 우리는 바로 독립전쟁론 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이제 바탕을 둬서 무관 학교를 만들었고 그 무관 학교를 만드는 여러 계획 중에 한 곳이 어디냐 바로 신흥부관 학교 였다. 그리고 그 신흥부관 학교는 바로 유하연 사모음포 추가가 라고 하는 곳에 만들었다 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죠. 처음에는 이름을 무관 학교 이러면 대회적으로 중국이라든가 일본의 가임실을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거기를 처음에는 강습소 라는 이름 으로 해서 독립군을 11년 6월에 만들어서 양성하려고 이렇게 노력 을 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이 사진 있지 않습니까 제가 직접 촬영한 겁니다. 현장을 가서 바로 이쪽 지점 이쪽 지점에 신흥강습소를 만들었습니다. 여기는 사모음포 추가가 라는 곳 입니다. 사모음포 유하연의 현소재즈 현소재즈 가 바로 사모음포입니다. 사모음포 또는 사모음포 라고 합니다. 여기서 아래쪽으로 조금 더 내려오면은 이러한 마을이 있습니다. 여기는 이제 중국성시가 온 데서 출시들이 들어섭니다. 출시들이 살기 때문에 추가가 라는 마을입니다. 이 마을 쪽에 이 앞쪽으로는 대단히 벌판입니다. 대단히 벌판이고 이쪽 마을이 있는 산 밑에 산자랑 밑에 바로 신흥강습소 를 만들었었습니다. 그래서 이 신흥강습소에서 학생들을 가리키는 그런 작업을 했다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겠죠. 유하연 사모음포의 여기가 이제 성문 입니다. 유하연 사모음포 성문이 되겠고요. 이쪽은 사모음포 우리식으로 말하면 은내 부분이 되겠고요. 여기 이제 중국 옷을 입은 중국 사람들이 보이고 이 건물 같은 경우도 대체적으로 중국적인 형식으로 된 건축물이죠. 우리 조선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초과집을 주로 짓고 사는 그런 형태 다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사진이 유하연 쪽에 우리 조선인 마을 조선인 마을의 사진이 되겠습니다. 대체적으로 이렇게 초과 형태를 띄고 있죠. 초과 형태를 띄고 있고 여기 보면 우리 학생이 보이는데 그 아래 바지하고 한복입니다. 한복이고 여기도 이제 조그만 여학생 같은 모습인데 여기 이제 여러분 아마 구체적으로 사진 모습이 잘 안보이리라고 생각합니다만은 초과집 형태에다가 우리 한국 옷을 입거든요. 한복을 입고 있는 그런 모습들이 보입니다. 바로 이러한 유하연 3홍복 이쪽 지역 이쪽 지역이 우리 한인들이 처음으로 신강습도를 만들고 청구의 심전 나라가 망한 다음에 암농강을 건너서 취임을 물읍쓰고 고생하면서 마차를 타고 또 제대로 쌀밥을 먹었겠습니까 조합이라든가 진짜 나물 이렇게 국구려서 된장국 토창국 이런 걸 먹으면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던 장소. 거기가 바로 유하연. 이거 바로 처음에 제대로 된 집을 짓고 살 수가 없었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바로 이러한 초과 형태의 집들을 짓고 사는 그런 액트탄 그런 어떤 현명의 기지 유하연. 초창기의 모습이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란 유하연 3홍보에 신흥부관 학교를 만들었는데 이란 신흥부관 학교를 만들었던 그런 어떤 이론적 토대는 바로 독립전쟁 논이었다 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죠. 독립전쟁 논은 뭐냐 바로 우리가 청구 10년 일본에 의해서 나라가 망했는데 앞으로 일본은 대략 침략 을 계속 할 것이다. 우리 한반도를 넘어서 바로 만주로 중국 본터로 또 미국으로 쳐들어 갈 것이다 또는 러시아로 쳐들어 갈 것이다. 즉 일본은 침략적 분성이 있기 때문에 일본은 앞으로 중일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러일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또 미일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실제 그렇지 않습니까 중국은 1937년에 1931년에 9월 18일에는 만주로 쳐들 어여서 만주 4변이 일어났죠. 1937년 7월 7일 날은 어떻게 됐습니까. 7.7의 4변 중일전쟁을 일으켰죠. 1941년 12월에는 진주만을 공격했 죠. 즉 일본은 끊임없는 전쟁을 일으켰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독립운동관은 그걸 얘기한 거예요. 그럴 때 바로 우리가 독립군이 일어났고 열악국이 일어났고 일본 과 싸우기에서는 우리가 무력이 있어야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독립전쟁을 대비해서 무력독립군을 양생해야 겠다. 그 이러한으로 바로 신웅부관 학교를 분만하니 수많은 무관학교를 만들어야 되겠다. 라는 그런 계획화의 만주 유아연 3원부에 바로 신웅부관 학교가 만들 어졌다. 라고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 보신부와 같이 서관도 북관도 북만주 지역에 이런 무관학교들을 만들었고요. 따라서 그런데 이러한 신웅부관 학교를 만든 주역이 누구냐 누구 의 아이디어에서 기본적으로는 신민회의 아이디어입니다. 신민회가 이러한 독립운동기지 해외 독립운동기지를 만들어야 되겠다 라고 이렇게 생각을 한 것이죠. 그런데 이것을 구체적으로 7천에 옮기 고 신웅부관 학교를 만들고 정착시키려고 최대한 노력을 했던 것은 우당 유해형 유쾌형제였다 라고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고 그 가운데서도 유쾌형제 가운데서도 실웅부관 학교를 현지 답사하고 조직하고 만들고 이끌어 나가는 데 주추적인 토대를 싸운 사람이 누구냐 바로 이해형이라는 인물이다 라고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해형은 신민회의 계획에 일하는 로서 독립운동 작업도 만들고 계획 도 추진하고 그리고 먼저 만주 현지로 갔습니다. 낯설고 물설은 곧 만주 압록강을 건너서 갔죠. 가서 압록강 건너자마자 다 단동이죠. 지금 현재 단동. 옛날에는 안동이라고 그랬습니다. 그 안동 바로 옆에 뭐냐 하면 관자년 입니다. 관자년이 한잔에 산입니다. 집안형 우리 국료로의 국내 성의 수도가 있었죠. 거기서 산지가 많습니다. 통화연 때도 마찬가지죠 통화연 통화 도 산지에요. 산지를 넘어서 가니까 거기에 나타난 평지와 더불어서 산이 나타난 거예요. 거기가 바로 뭐냐 유화연입니다. 그리고 거기가 어디냐 유화연 3원본 거예요. 그래서 그 당시에 보다리장사 보다리장사 형태를 뛰고 우당 유해형을 비롯한 여러 동지들이 함께 독립운동 기지를 물색을 하러 갔던 것이에요. 그래서 1차적으로 유화연 3원보 추가가 라는 지역. 그러니까 뒤에는 산이 있지 않습니까 앞에는 벌판이 있어요. 그렇죠 읍내, 읍소지해지면 바로 일본의 발각대기가 쉽죠. 그래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와서 독립운동 기지를 처음으로 선택하고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추진했던 인물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당 유해형입니다. 그리고 이런 계획을 세우고 현재를 현장답살하고 국내로 와서 뭐니뭐니 해도 중국 이국당에 가서 기지를 만들고 독립군을 양성하려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게 뭡니까 기본적으로 필요한 건 도난입니까. 그렇죠 돈을 마련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돈 마련하기가 그렇게 쉽습니까 말이 돈 돈 돈 하지만 그 돈을 마련하게 해서 가장 실질적으로 애쓰고 진짜 자금을 가장 많은 자금을 마련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당 유해형이죠. 뭐 아무리 그 저기 친형제라도 혈육을 낮은 형제라도 사실은 돈 빌려 달라고 돈 내라 그러면 요새도 그 시은인 아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형제들을 설득해서 형제들이 다 동첨을 하고 또 돈 또 내고 그렇죠 이런 그 저기 그 신우간업계을 만들고 한 최대 안에 여러 가지 국내에서의 밑거름 밑거름 파탕 이거를 만든 사람이 누구냐 바로 우당 유해형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진짜 형제들 간에도 신뢰 가 있었던 것 같아요. 또 형제들 간에 지금 오해가 있고 믿음이 있고 그렇죠 그렇지 않으면 은 누구 아무리 지금 같은 형제라도 뭐 동생이 뭐한다 형이 뭐한다라고 해서 자기 전체산 다 털어 가지고 뭐 외국까지 갈 사람 요 솔직히 요새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랬다는 거죠. 그리고 또 뭐 만주당까지 갔어요. 만주를 갔더니 이 만주의 중국의 중국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중국 사람들은 뭐 만주 중국 본토의 북경이라든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중국 동북지방 아닙니까 중국 동북지방의 유하연 뭐 이런 데는 예를 들어서 여러 번 잘하시는 만주의 요용성 랭링성의 중심도시가 바로 시명 아닙니까 옛날에 봉철이라고 그랬 죠. 그다음에 이제 길림성의 중심도시는 예콘데 장춘이라든가 길림이라든가 또는 뭐 해외룡 양성 흥룡광세의 중심도시는 바로 하을필이죠. 그런데 이런 지역 같은 경우는 어떻 습니까 대단이잖아요 대단이 큰 도시잖아요. 그러니까 뭐 거기서는 뭐 조선 사람이라도 뭐 돈뜨막고 이런 사람도 본 적이 있겠죠. 그런데 유하연 사문보라든가 이런 시골. 깜촌이죠. 속된 말로. 이런 지역에서 조선 사람을 제대로 본 적이 없잖아요. 또 양반. 우리가 중국 사람들이 보니까 만주의 시골 첫놈들이 보니까 조선의 고관 대작. 그렇죠 이런 사람들이 막 막 막 막 막 막 막 막 막 eder. 어 이 사람들이 그냥 뒤집어지는 거야. 와 깜짝 놀라. 그리고 저놈들이 우리 중국의 집은 만족 쳐다보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어떤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현지에 있는 관리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우리 조선 사람들 독립으로 하러 간 사람들 배척하는 거죠. 이러니까 또 이제 가장 중요한 건 먹고 살고 지내야 되는데 그럴 리가 뭐가 있어야 돼요. 땅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땅을 안 파는 거예요. 소작도 안 주는 거예요. 안 빌려준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회영 선생님이 어떻습니까 북경으로 날아간 거예요. 그래서 누굴 만났어요. 위안 스카이. 이제 원세계를 만난 거예요. 원세계를 여러분 아시죠. 그러니까 이목울란 때 조선의 본권 정부를 지지해 주기 위해서 지원 해 주기 위해서 우리 서울에 와 있었던 청나라 원세계 위안 스카이. 그때 이제 이회영 선생님 아버님 하고도 알고 또 우당 위영 선생님 도 알고 지냈거든요. 그래서 그런 인연이 있어서 또 북경 까지 가서 위안 스카이하고 단판 을 쪄서 토지를 이제 살 수 있는 그런 또 중국인의 배척을 맡는 그런 어떤 방파자 역할 이걸 누가 있느냐. 바로 우당 위영 선생님 했던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데 조금 전에 여러분 보시는 바와 같이 유하연 사문보라는 지역 있지 않습니까 이쪽 지역 같은 경우는 지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에 큰 도로가 있단 말이죠. 도로가 있는데 이 도로 곁에 가까운 곳에 이런 신훈 강습소를 만들었 단 말이죠. 우리 막명기지를 만들었단 말이죠. 그러다 보니까 어떻게 돼 일본에 의해서 탈론할 수 있는 감시를 받 기가 쉽잖아요. 그러니까 독립운동 기지를 어떻게 돼요. 좀 더 안쪽으로 자꾸 옮겨야 될 수밖에 없지 않았습니까 뭔가 산악 지내 깊순간 곳에 옮겨야 되는데 뭐 땅을 달리 구입할 방법이었 단 말이죠. 그래서 그 땅을 즉 유하연 사문보에서 통화연 합리화적으로 독립운동 기지를 옮기거든요. 옮길 때 그때 바로 합리화 지역에 땅을 살 수 있도록 역할을 하는 사람이 누구냐. 바로 우당 위영이다 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즉 우당 위영은 만주의 신흥부관 학교를 설집하는데 큰 공원을 했고 또 초창기의 만주 지역의 신흥부관 학교를 운영하고 또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토대를 닦은 인물이 누구냐. 바로 우당 위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쪽에서는 우당 위영을 철저히 감시하고 또 우당 위영을 체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라고 해서 2013년에 바로 일제가 우당 위영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당 위영은 또 여러 동기들이 바로 일본에 그런 감시와 체포를 피해서 일단 피신을 하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당 위영은 신흥부관 학교의 초창기에 있어서 굉장히 큰 역할을 했고 그 이유는 우당 위영과 함께 막명했던 다른 형제들이 바톤을 이어 받아서 계속해서 신흥부관 학교의 유지 발전에 기여할 수밖에 없 었다 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 겠습니다. 특별히 여러분이 너무나 잘하시는 부와 같이 이석영 호가영석이죠. 이석영 선생 같은 경롱 우당 위영의 형입니다. 그리고 조선에 있어서 아주 고급 깔려 죠. 그런데 이제 우당 위영 선생의 설득 하에 바로 자기의 전제산을 신흥부관 학교의 설립과 운영 또 신흥부관 학교의 운영 특히 학생들의 어떤 교과서라든가 식사라든가 숙식 모든 것들을 제공해주는데 자기의 전제산 을 시생했던 사람이 누구냐 바로 이석영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일부 사람들은 이석영의 재산이 1910년 11년에 신흥부관 학교가 만들어지고 그리고서 거기다 재산이 소진된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1910년 정도까지 이석영의 재산 이 지속적으로 합략에 이동한 다음에도 지속적으로 신흥부관 학교의 유지 발전에 기여를 했습니다. 다만 그 당시에 우리 조선의 합회 가치와 중국에서의 조선의 합회 가치는 좀 다르죠. 아무래도 이제 우리가 나라가 망 하다 보니까 재산 가치가 실질적으로 있던 것보다는 중국에서는 재산의 가치와 위상이 조금 약화됐다라고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본터로 넘어가기 전까지 이석영 선생은 끊임없이 만족벌에 계속 남아서 우당 유혜영 선생은 피신을 했고 이석영 선생은 계속해서 나중에 19년 도의 심향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저까지는 농촌에 있고 산간지대에 있다 보니까 굉장히 기침도 많이 하고 여러 호흡골 난이다든가 여러 가지 질병들이 많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상궐을 피해서 도시로 이동을 했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이야기 될 수 있는 분이 바로 이슈영이라는 분이 되겠죠. 이슈영은 조선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중앙괄료였죠. 그리고 대회적인 명망도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슈영 같은 경우는 굉장히 만족적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데 있어서 또 큰 결을 했고 또 이슈영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들어진 다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무부 장관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부 장관 이런 역할을 굉장히 많이 하신 분이죠. 따라서 이슈영 선생 같은 경우도 만족해서 실은부관 학교에서도 굉장히 큰 역할을 많이 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지금 현재 잊고 있는 우당 유혜영 육정재 가운데서 이 호영이라는 또 인물이 있습니다. 이 호영이라는 인물 또 신부관 학교에 있어서 우당 유혜영 선생이 떠난 다음에는 실무 역할을 해서 많은 역할을 했고요. 그런 것들이 요새야 새롭게 발굴되는 중국의 당한 자료에서 많은 내용들 이 지금 새롭게 밝혀지고 있다라고 또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처령이라고도 있어요. 이처령 선생도 있는데 이 분 또 우당 유혜영 선생한테 형인데 이 분 또 신부관 학교 교장도 하고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즉 신무관 학교의 설립의 주역 주역은 우당 유혜영 육정재가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왜영 선생이 2013년 국내로 피신한 다음에는 다른 형제들도 끝까지 만족벌에 남아서 신무관 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큰 계열을 했다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바로 유혜영 선생의 모습이고요. 여기 이시영 선생의 모습이죠. 이시영 선생은 또 해방 외에 대한민국 에 있어서의 부통력 역할을 했던 그란 굉장히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그란 인물이다 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당 유혜영 선생 같은 경우는 아시는 것처럼 2019년 3일 운동 후에는 또 20년 대 30년 대에는 또 아랍키즘을 받아들여서 또 젊은이들과 함께 호흡하는 일반 대중들을 위한 그런 운동 또 굉장히 열심히 한 그란 항일지사로서 항상 젊은 젊은 마음으로 함께 항일투쟁했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죠. 신흥부관 학교는 우당 유혜영 육청재 많이 또 항일투쟁을 한 것은 아니 죠. 우당 유혜영 육청재를 도와서 또 때에 따라서는 우당 유혜영 육경재 한께 더불어서 항일투쟁을 했던 많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경상북도 안동사람 석주이상용 또 석주이상용의 큰 차나민 김대락 또 일송 김동삼 이런 분들의 활동 이 지금까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석주이상용의 문지비인 석주유고 그다음에 김대락의 문지비인 백화일기 등을 통해서 이분들 이상용 김대락 김동삼 이런 분들이 신흥부관 학교 또 신흥강습서 또 신흥주강 뭐 이렇게 학교 명을 조금씩 바뀝 니다 하면 신흥부관 학교의 운영 과 관련해서 또 재정과 관련해서 많은 기여를 했다라는 사실 들이 지금 학계에 설계에 보고가 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계적사람인데요. 여준 윤기섭 김창환 인면수 또 이러한 또 새로운 인물들이 또 신 흥부관 학교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라는 기록들이 나오고 있는데요. 여준 같은 경우는 경기도 용인 사람 이고요. 윤기섭은 경기도 파주 김창환은 경기도 광주 인면수는 경기도 수원 사람입니다. 그래서 요새 학계에 새롭게 여준 윤기섭 김창환 인면수 이런 분들의 활동이 새롭게 학계에서 조망이 되고 있습니다. 여준 선생 같은 경우는 교장도 했고 윤기섭은 청년이었습니다. 청년으로서 학감도 했어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과 더불어서 함께 호흡하면서 특히 윤기섭은 독실 한 어떤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신흥부관 학교가 어려운 시절에 김창환과 함께 신흥부관 학교 유지발전을 위해서 굉장히 기여 했다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고요. 김창환 같은 경우는 대안재국 육군무관 학교 출신으로서 대안재국의 장교 였어요. 그런데 만주로 막명해서 학생 신흥부관 학교에서 학생들의 교육에 크게 기여했던 그런 인문이 되겠습니다. 인면수는 수원 사람인데요. 수원에는 3일 여학교 남학교가 있습니다. 3일 학교에 교장선생도 했고요. 또 상동청년회 상동교에도 다녔고 또 만주로 막명해서 신흥부관 학교 에서 객주업 같은 걸 하면서 신흥부관 학교에 여러 학생들의 지도라든가 또는 여관업을 하면서 또 수식제공 이라든가 그런데 많은 역할을 한 것으로 저렇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충청도 사람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장을 했던 이동령 또 충남 천안 사람이었던 이장령 또 대안재국 군인이었죠. 또는 충남 사람 이세영 이런 사람들 또 충청도 사람들도 굉장히 많은 역할을 했고요. 또 황회도의 왕삼덕이라든가 등등 많은 사람들이 했습니다. 즉 신흥부관 학교는 우당 유경계와 더불어서 경상도 사람 경기도 사람 또는 충청도 사람 또 황회도 사람 등 신민회의 수많은 구성원들이 신흥부관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 을 더불어서 함께 했다라고 이렇게 말씀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내용 이고요.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세영은 재정적인 역할을 크게 했고 이상용 이런 분들은 이상용이라든가 김대락이라든가 또는 김동삼 이런 쪽은 혁신유름이로서 상당한 학식 을 많이 갖고 있어서 일정한 자문 역할 또는 재정적인 지원 또 했고요. 또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대안재국 육군부관 학교 출신이고 대안재국 의 장교였던 바로 김창환이 일정한 역할을 했고 그다음에 또 무관학교 이기 때문에 교재가 필요했거든요. 군사교재 이런 것들은 그 당시 보송 학교를 초록했고 최고의 에리티 였던 젊은 청년 바로 윤기섭이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무관학교의 여러 교재들을 번역하는데 큰 계열을 했다라고 이렇게 말씀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바로 석주이상용의 모습이고요. 김동삼의 모습이 되겠습니다. 석주이상용 같은 경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 국무령 내가 책임져 있을 때 최고 책임자 역할 또 1920년대 중반에 했던 그런 인물이고요. 중국옷을 입고 있죠. 그래서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바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한복을 입으면 바로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이국당에서 만재에서 중국본대에서 바로 알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됩니까 중국옷으로 변장을 하는 거죠. 여러분 들 만약에 상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 사진을 보면 전부 다 양복을 입고 있습니다. 왜 상에는 일반적으로 다 양복을 입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만 중국옷을 입는다고 우리가 한복을 입고 있으면 바로 일본어로만 탈란 하죠.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요. 상에서 독립운동에서 독립운동 했던 사람들은 상의 시절에는 전부 다 양복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윤 봉인 의거 이후에 임시정부 의원들이 PC를 잔뜩 그때는 대부분 다 중국옷을 입고 있습니다. 중국옷을 입고 있고요. 또 만재에서 독립운동했던 지도자들은 대부분 이렇게 중국옷을 입고 있다라고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윤기석과 김창원 의 모습이 되겠고요. 그다음에 이동령 임면수 이런 분들의 모습이 되겠습니다. 신흥무관학교를 신흥강습서 신흥중학 신흥무관학교로 변화 발전했는데 사실은 신흥강습서 나 신흥중학 도 이름은 사실은 실질적인 이름은 뭐냐 바로 신흥무관학교죠. 그런데 은폐원폐라는 거 있지 않습니까 일본의 탄압이라든가 또는 중국사람들의 어떤 배척이라든가 눈을 피어 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강습서 또는 중학 뭐 이런 피해온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어떤 이름을 사용 했다 손 치더라도 기본적으로 배용 실질적인 내용은 다 무관학교였고요. 그리고 특별히는 이제 2019년 20년에는 신흥무관학교라는 그런 이름을 사용 했다 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처음에 신흥무관학교는 유아연 사문부에 있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신흥무관학교는 1912년 13년에는 통화연 합리화 쪽으로 이제 이동을 합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많이 들어오고 분만 아니다 일본에 감시를 피해야 되죠. 그러니까 상골로 상골로 상골로 이제 피신을 해서 꼴짜기에다가 신흥무관 학교를 만드는 거죠. 그래서 사문부 같은 경우는 평지에 있지만 3 밑에 있지만 합리화 같은 경우는 상골짜기에 위착이 된다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19년 3일 언덕 이후에는 국내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이제 만주 땅으로 오거든요. 그래서 이제 넓은 교사가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유아연 고사자 유아연 대두자 등 수많은 여러 지역에 신흥무관학교를 여러 곳에 만들게 된다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약 3,500명이나 되는 수많은 그런 무관들을 생도들을 졸업시킨다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죠. 바로 이곳입니다. 여기가 바로 합리화에요. 이 강입니다. 겨울에 찍었습니다. 그리고 여기가 신흥무관 학교가 있었던 장소입니다. 사실은 신흥무관 학교는 이렇게 이렇게 꼴짜기 꼴짜기 꼴짜기를 선을 넘어오면 아까 조금 전에 여러분이 방금 보셨던 이러한 곳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여기에 물이 흐르고 합리화 할 때 물화 짜죠. 그리고 여기에 신흥무관 학교가 있었다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고 여기서 훈련 받으면서 이제 여름에는 텀븡텀븡 여기 가서 모욕도 하고 무장구도 치고 했던 그런 역사적인 현장입니다. 여러분 한번 신흥무관 학교 한번 가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가 워낙 이렇게 꼴짜기로 들어오고 우리 독립군들이 여기 양쪽 을 지키고 있거든요. 그래서 조선 사람들이 잘못 들어오다가는 밀정을 오해받고 총 맞습니다. 그래서 그때 밀정이라고 오해받고 총을 딱 맞은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구일까요 키즈 여러분. 바로 만의 한용훈 스님입니다. 만의 한용훈이 청구 10년대에 바로 신흥무관 학교를 찾아오다가 우리 독립군들한테 체포되고 총을 맞았다. 죽을 뻔 했죠. 그렇죠. 그만큼 신흥무관 학교의 독립군들 기지가 깊숙한 곳에 있었고. 그리고 철저하게 방어가 된 그런 속에서 무관교육을 시켰다 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여기 통화연의 모습이고요. 통화연 합리화 통화연 통화연 통화연은 그래도 유화연에 비해 하면 상당히 큰 그런 지역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신흥무관 학교잖아요. 무관 학교니까 기본적으로 군사교육을 시켰다는 거죠. 군사교육을 시키면서도 특별히는 공화주의교육. 즉 죽고는 국민에게 있다라고 하는 그런 철저한 공화주의교육을 시켰는데 그런데 기독교 대종교 유교 이런 것들이 혼합된 그런 형태였습니다. 대종교라는 건 우리의 조상 이 바로 당분 할아버지다라는 것이죠. 당분. 즉 우리는 당분의 후손이다. 따라서 당분의 후손들이 주대인 구성원이 되는 그런 민족국가 즉 민족국가를 만들어야 된다. 그래서 철저하게 당분에 대한 교육 이라든가 대종교교육을 시켰습니다. 신흥무관 학교에서.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유교적인 어떤 소향을 갖추면서도 혁신. 그렇죠 혁신. 저 깨어있는 유학자 유학교 이런 거 시켰어요. 더불어서 기독교교육도 시켰습니다. 그래서 신흥무관 학교에서 공부를 잘 했죠. 상을 줘요. 상을 뭘 주냐. 추례급기 성경 이런 거 있죠. 이런 거를 상으로 줍니다. 그리고 신흥무관 학교에서 만든 잡지가 있어요. 거기에도 기독교에 대한 내용들이 굉장히 많이 실려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우리의 어떤 전통적인 유교 그다음에 당군 그다음에 기독교 전 기독교적인 근대적인 사상 민족주의 공화주의 이런 것들을 교육시킨 것이 바로 신흥무관 학교였다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고요. 그리고 그런데 이제 신흥무관 학교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먹고 살리기도 상당히 힘들잖아요. 그러니까 낮에는 신흥무관 학교생도 이렇게 농사를 짓고 그렇죠. 그다음에 이제 밤에는 공부하는 그런 형태를 뛰고 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민족교육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한국사 한국질이 이런 것들 통해서 우리의 역사를 알아야 되고 우리의 질의를 알아야 되고 그래야만 우리가 조국에 해방됐을 때 광복됐을 때 제대로 된 북가를 건설해 나갈 수 있다라는 그리고 철저한 어떤 사상교육과 민족교육을 바탕으로 해서 무관을 양성하려고 했다. 독립군을 양성하려고 했다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독립군이 양성되죠. 졸업을 하죠. 그러면 졸업을 했을 때 그 졸업생들을 하나의 조직화하는 그러한 것도 만들었 습니다. 그것이 만약 신흥하고단 또는 신흥교우단입니다. 그래서 졸업생들을 조직을 해서 철저하게 민족교육을 시켜서 일본군 과 대항하는 독립군부대를 만들기 위해서 이러한 신흥하고단이라는 걸 조직하고 그러면서 신흥하고보 또는 신흥교우고와 같은 그런 잡지 들을 관행해서 센도들과 졸업생들의 민족우식 고치를 위해서 크게 노력 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이러한 신흥하고보 라는 잡지가 지금 독립기념관 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 한 세 건 정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는 민족우식 고치기라든가 또는 근대적인 그런 내용이라든가 여러 가지 전략 전술에 대한 거라든가 이런 많은 것들을 이 잡지에 실어서 잡지를 통해서 민족교육에 기여 했고요. 이러한 잡지들은 어디서 발견된 거냐면 미국에서 발견된 겁니다. 이런 신흥하고보는 만주에만 뿌리는 것이 아니라 배포하는 것이 아니라 미주 지역 러시아 지역 수많은 해외 우리 독립군부도 기지 이쪽에도 많은 이러한 잡지들을 배포를 해서 민족우식 고치와 독립군 양성에 크게 기여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라고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1919년 1911년 6월에 신흥부관학교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수많은 독립군들을 배추시켰습니다. 그리고 신흥하고단 교우단을 만들어서 이러한 졸업생들을 주직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1919년 3월 1일 날 국내에서 뭐가 됐어요. 3일 운동이 일어났죠. 그래서 만주 땅에서는 19년 3월 12일 날 유하연에서 19년 3월 13일 날 북간도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국내에서 만세 운동이 쫙 일어났더니 일본 애들이 우리 청년 애국 청년들을 막 잡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수많은 학생들이 어떻게 돼요. 만주 땅으로 막명을 합니다. 그러면서 무관학교에 들어옵니다. 즉 신흥부관학교에 찾아오는 거죠. 그래서 신흥부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애국 청년들만 막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수한 그다한 구사 지식을 가졌던 김경천과 지청처는 바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들 입니다. 일본군 장교들입니다. 일본군 장교들도 만주를 막명해 오는 거예요. 그리고 심팔군과 같이 또 대안제국에 장교했던 사람도 막명해 오는 거예요. 그래서 수많은 애국 청년들이 신흥부관학교 생도가 되고. 또 일본군 현역 장교 또는 대안제국의 장교 이런 수많은 또 에리뜨 교관들이 막명해 오므로써 이 사람들이 바로 신흥부관학교 교관이 되어서 또 신흥부관학교 생도들을 양성하는데 굉장히 큰 계열을 했던 것이죠. 그러니까 만주 지역에는 뭐라 그럴까요 무장투쟁이 어떤 기후 그런데 삼위동동 때도 또 일본 애들이 우리 재압약살 사건을 비롯해서 평화적인 만세 시위로 하는 수많은 우리나라 사람들 죽였죠. 무참 약살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안 되겠다 일본 놈들 우리가 키우는 이라는 무장을 가지고 무장력을 가지고 국내로 쳐들어가서 일본 제국지를 뭐라 해야 되겠다 라는 어떤 강력한 의지 이런 게 있는 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윤기석 김창완 동 수많은 사람들이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윤기석을 상해로 파견하는 거예요. 파견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침을 합치고 연락을 해서 그래서 도산 안창우의 동립전쟁론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결국은 일본 과 전투를 벌이게 되죠. 그게 뭡니까 바로 신흥무관 학교 졸업생들이 주요 배경이 됐던 바로 봉우동전투와 청선이 전투의 승리 이런 것들은 신흥무관 학교의 동립권배양 무장투쟁론 이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라고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일본 육사 육군사관 학교 기병과 출시입니다. 경청장군 또 광복군 나중에 총사령관이 되는 지청천장군 다 일본 육사 출신들이에요. 일본군 현역 장교들입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이 그런데 이런 현역 장교들이 만주로 막명해서 무관 학교 신 무관 학교 생로들을 교육시키니까 더 현대화된 그런 무관 교육을 시켰던 것이죠. 심팔균 같은 경우 또 대한민국의 장교 출신으로서 또 만주의 막명 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유아연 고산자 또는 유아연 고산자 유아연 대두자 이런 쪽인 또 신흥무관 학교가 확장돼서 신흥무관 학교가 설립이 됐다라고 말씀 드릴 수 있죠. 여기 유아연 대두자 지역입니다. 이쪽은 제가 현장에 가봤는데 전부 다 가봤는데 옥수수바수로 되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사진을 한 장 아까는 여러 개 갔던 거고요. 겨울에도 가봤는데 유아연 대두자 신흥무관 학교짜리 지금 현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걸은 반대 없습니다. 그쵸 세월이 흘러서 그런데 역사의 현장 여기 딱 가오니까 신흥무관 학교 생대로 이렇게 운동하고 그냥 전툴련받고 이런 것들이 많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1911년 6월에 만들어진 신흥무관 학교 1920년에는 봉구동 전투 청산위 전투 그다음에 대전자령 전투 그리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우리 항일전투에 참가했던 그런 신흥무관 학교 생더들. 그렇죠 여러분 보시는 분과 같이 만주의 독립권 그다음에 중국 본투에서 의열단 그리고 또 신흥무관 학교 출신들이 또 교육을 많이 받다 보니까 어떻게 됩니까 분사지식이 많죠. 그러니까 분사지식이 많으니까 북간도 지역 청산위 전투에 승리로 이끌었던 북간도의 북러군 정서 여기에 북러군 정서 사관학교가 있었거든요. 사관학굴이 있지만 가리킬 교관이 제대로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흥무관 학교 출신들을 김잘진 장군이 초빙을 한 거죠. 대표적으로 박영일하던가 여러 사람들을 신흥무관 학교 출신들 초빙을 해서 이 사람들이 바로 뭘 합니까 북러군 정서 사관학교에서 생더들을 교육 시켜서 바로 청산위 전투를 승리를 이끄는데 큰 역할을 또 했던 것이죠. 그래서 이 모든 또 신흥무관 학교 출신들이 국내외의 모든 무관 학교에 하나의 교관으로서 또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신흥무관 학교는 바로 독립군 양산의 신무관 학교 출신들이 독립군이 됐고 또 그 사람들이 수많은 독립군 무관 학교의 선생님 교관들이 돼서 독립군을 재생산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큰 역할을 했다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신흥무관 학교 그렇죠 또 봉우정 천산위 또 광복군 즉 이 졸업생들의 항배를 보면 신흥무관 학교의 역사적 위상과 의미가 얼마나 큰가 라는 것을 우리가 다시 한번 재생임질 할 수 있다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신흥무관 학교의 설립과 그 역사적 위상에 관해서 여러분들한테 좀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흥무관 학교는 바로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에 따라서 해외에 만들어진 수많은 독립군 무관 학교 가운데 하나다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수많은 우당위형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 내 후원과 지원과 활동에 위해서 신흥무관 학교는 무지 발전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졸업한 수많은 독립군들이 항일 독립운동에 너무너무나 큰 기여를 했고 그리고 해방 외에 우리 대한민국의 어떤 건설에 있어서도 미랄이 됐다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신흥무관 학교 출신들 졸업생 1란표를 제가 만들어봤습니다. 만들어보니까 한 약 400명 정도만 이름을 알 수 있습니다. 3,500명 가운데 3,100명의 이름은 지금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신흥무관 학교 졸업한 수많은 이름을 남기지 않은 우리가 이름을 알 수 없는 그러한 수많은 그라신흥무관 학교 졸업생들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신흥무관 학교 한국 독립운동에 바로 요람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6월 10일 신흥무관 학교 설립 110기년입니다. 여러분 우리 다 함께 신흥무관 학교 한번 기억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오늘 이 강의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 다음글 제89회 인공지능의 기초
- 이전글 제87회 일제강점기의 저항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