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차 광개토태왕릉비 와 고대사 재조명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0-12-21
조회: 3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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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차 우당역사문화강좌
현존하는 우리 민족에 의해서 최초로 쓰여진 당대 역사서
광개토태왕릉 비문에 나타난 고구려인들의 세계관에 대하여 알아보는 시간
주 관 : (사)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재)우당이회영선생교육문화재단
주 최 : 서울특별시 종로구청
[자막]
여러분 반갑습니다. 우리 전통이 있는 우당 역사문화 강좌에서 강연을 하게 된 것에 대해서 상당히 기쁘고 또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자리를 말은 해주신 우리 우당 이회영 선생님 기념사업회 이종찬 원장님께도 감사드리고 또 이를 후원해주신 종로구청 관계자들에게도 심심한 감사 말씀을 같이 드립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릴 내용은 고대사 관련해서 최대한 쟁점 중 하나인 광개토 대왕 등 비와 관련해서 우리 고대사를 어떻게 해설갈 것인지에 대해서 제가 비록 처음부터 역사하는 전공을 안 했지만은 나름대로 한 십여년 넘게 실험도 하고 또 직접 현기도 답사하면서 정리하고 연구했던 것을 오늘 이 자리에서 발표를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접근 시각은 기존에 어떤 역사선화 또는 학자들의 강의나 이런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제 나름대로 접근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우리 고대사 잘못된 부분을 나름대로 이런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 새롭게 연구를 해야 한다. 이런 주장을 감이 오늘 하는 그런 시간입니다. 원래 그렇습니다. 어느 분야에서 일과를 이르면서 안정된 지위를 확보한 사람들은 사실 말씀하셔서 안정된 인생 행로를 걷는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분야에 구해받지 않고 그 영역을 염날드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또 경멸하면 그런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바로 그런 사람들 아마추어나 또는 아웃사이드들은 꿈과 열정에 의해서 역사가 발전되어 왔습니다. 우리 역사학개만 보더라도 고고학개만 보더라도 그런 내가 수없이 만듭고 트로이를 발굴한 슐리임한 역시 비 전공자로서 본격적으로 트로이를 발굴할 때 전공자나 또는 그분야의 학자들은 일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심지어는 발굴을 방해한 그런 사례도 있습니다만 그렇지만 결국 트로이는 발굴이 되었고 오늘날 슐리마는 업적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이런 상황입니다. 물론 제가 뭐 그런데 비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은 아마추어다 아웃사이드라 해가지고 그걸 이 펴매하면서 무시하는 어느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저는 우리 역사학 그 중에서도 고대사 부분이 가장 문제가 심각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는 이 연구를 이번에 하면서 그걸 빼다르게 느꼈습니다. 그 하나하나를 제가 지금부터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우리 광개토 태왕능비로 그게 맞추기 위해서 이렇게 부르겠습니다. 이 광개토 태왕능비는 저는 우리 민족에 의해서 최초로 쓰여진 현존하는 그 당시 역사서다. 단순한 비문이 아닙니다. 이건 역사서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414년 장수왕 2년 9월 29일에 당시 고구리의 수도였던 국내성 지금 지반이 뛰어 지한 지반시와 동쪽 한 우리 쪽에서 봤을 때 남쪽에서 봤을 때 동쪽 한 시별이도 한 4kg도 안 떨어진 이 지점에 걸립되었습니다. 걸립 연대와 그리고 그 비가 세워진 장소를 정확히 할 수 있는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그런 비입니다. 지금 어느 비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비는 모두 다 그 세워진 장소를 정확히 모르거나 또는 알다 하더라도 그건 이미 박물관에 다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광개토 태왕능비만은 그 웅장한 모습 약 몇m죠? 6m 정도? 4m 정도? 함무라비법전을 기록한 함무라비비가 굉장히 크다고 합니다만 이것도 높이만 가지고도 태왕능비의 3분의 1도 안 됩니다. 아주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그런 고비입니다. 전체 문자 수 저는 1802자 아로봅니다. 중국학자 왕건군의 학서를 따라서 1775자로 많이 쓰고 있으나 저는 중국학자 김석형 박시영이 연구한 이걸 저는 토대로 1802자 아로봅니다. 그리고 이 중 판도 가능한 1534자입니다. 약 85%가 회복이 가능합니다. 1534자의 비문에는 광개토 태왕의 치적뿐만 아니라 고구리를 중심한 당시의 국계정세, 그리고 고구리어민들의 세계관, 내지 역사관, 그리고 고구리어 사회재들을 알 수 있는 유중한 문원이라고 저는 봅니다. 기록들이 들어있습니다. 이 광개토 태왕비는 지금부터 1600년 전에 세워졌습니다. 정확히는 1606년 전이죠. 1606년, 414년에 세워졌으니까요. 그 당시 그 1600년 전에 세워진 그리라고는 전혀 느끼지 않을 정도로 문체가 굉장히 체계적이고 유료합니다. 번역뿐만 아니라 한자를 하나하나 맞춰서 대조해 봐도 정말 그런 문체가 논리적입니다. 그리고 문학적으로도 가치가 있습니다. 삼국사기가 언제 세워졌습니까? 1145년, 인종 23년에 세워졌습니다. 이는 지금부터 731년 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731년 전이라면 1289년 전입니다. 올해부터 계산하면 고려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의 고구리어 광개토 태왕 시대를 언급할 때는 지금부터 우리가 지금 고려시대의 역사를 쓰는 그런 시간입니다. 어느 것이 더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반영하는가. 그 당시 직접 고려인들이 쓴 그 그라고 그 이후 731년 후에 쓴 그 역사사하고 어느 것이 더 정확한지는 우리가 부태의 얘기를 안 해도 합니다. 중국 역사사 중에 사기나 전환서, 후환서, 삼국지 정도를 빼고는 전부 그 동안 양서, 진서, 수서, 전당서, 후당서. 이건 전부 다 광개토 태양 비밀보다 훨씬 늦게 쓰여진 겁니다. 일본의 일본석이 720년에 쓰여졌죠. 그리고 보사기가 712년. 이것보다도 훨씬 더 앞서서 고려인들이 직접 자신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 바로 광개토 태양릉 비다. 묘지 비문은 다시 세계를 수가 없습니다. 역사서는 쓰고 나서 폐기도 하고 수정 보안도 합니다. 우리 조선왕주 실력도 수정 실력이 나왔을 정도로. 그렇기 때문에 비문의 세긴 역사야말로 가장 저는 정직하고 정확하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아주 하찮은 인물을 묘지 비문의 행간에도 역사의 큰 사건들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당나라 안사은한테 당시 현종이 화값지도 장암을 버리고 뛰쳐 도망간 사실이 당나라 오늘 시나의 묘지 명예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나라 286년간에 연호가 그대로 묘지 문에 나타나 있다고 봅니다. 제가 광이 쓴 사과가 조금 이래서 여기까지 해서 화면을 좀 봐주십시오. 제가 앞에다가 광개토 태양릉 비 관련해서 몇 개의 사진을 전부했습니다. 이게 1916년에 찍은 사진이라고 합니다. 발견된 후에 1980년에 발견돼서 1928년까지 이런 상태로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게 1928년도에 비각을 사용 겁니다. 이 비각이 197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다가 비각이 오래되어 가지고 무너질 전문가가 있기 때문에 비각을 거둬 낸 겁니다. 1970년대 후반의 사진입니다. 집안에서 나온 자료에서 아마 많이 보셨을 겁니다. 아주 심원하게 됐죠. 그 위에 다시 집어넣은 게 이게 현재 비각을 다시 찍어 놓은 겁니다. 우리가 항상 지금 보면 이걸 다 가서 보고 그렇게 하고 있죠. 비각은 좋은데 비각의 지붕은 완전히 청나라 지붕의 전형입니다. 그리고 이거야 하면 비문을 확대하는 거고요. 그러면 이건 비문을 확대하고 탁돈을 뜬 건데요. 얘 만 제가 드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것은 비각에서 200m 떨어져 있나요? 200m 내지. 이 떨어져 있는 태왕릉이 바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게 태왕릉이죠. 여기서 150m 200m도 저는 안 떨어진 걸로 보고 있어요. 태왕릉이 보이고 바로 앞에가 북한입니다. 암노강이고 암노강은 이게 북경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집안을 북내성을 남북으로 가르는 한강처럼 가르는 동네 강이었어요. 우리는 이것만 생각하고 마치 외진 곳이다 이렇게 보고 있는데 이 산 넘어가고 하면 평양도 평양이 펼치지죠. 바로 북한이 앞이 이게 다 지금 저쪽 앞에 섬에 하나 있지요. 그 다음에 이건 태왕릉 꼭대기에 올라가서 태왕릉 위에 올라가서 제가 찍은 건 원래는 올라가서 만들었는데 3년 전에인가 갔을 때 찍은 겁니다. 이건 여기 사진 보인종을 2018년도 5월에 가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까 원장님 말씀하신 대로 원장님 모시고 여기 또 허성관 전장관. 또 우리 이덕일 교수님이 그 당시 총 계획을 해 가지고 가지고 최신훈 대표도 같이 가서 그때 신흥부관학교 관련 유적지도 탐사하고 집안을 거쳐서 심양 거쳐서 대령까지 이렇게 탐사한 그때 살인이다. 2년 전입니다. 2년 조금 더 된. 그다음에 이것은 이런 말 연모 우리는 모두로며우로 알고 있습니다만 연모며지요. 바로 거기서 왕이토 태왕릉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두로며우는 연모며우의 가신의 모두로가 글을 썼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로며우 라고 하는데 연모며우가 정확하다고 봅니다. 이것은 연모며우로 들어가는 입구. 이건 제가 직접 3년 전에 갔을 때 찍은 겁니다. 그다음에 연모며우에서 조금 앞으로 나오면 이게 만폭 하는 암독관 철교하고 북한하고 연결되는 바로 앞에 있습니다. 왕이토 태왕릉비도 북한을 바로 앞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따 설명할 수 있는 연가 7년 명의 연호 관련해서 제가 설명드리는 겁니다. 내용을 좀 빨리 진행을 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아까 당나라 역사 전체 역사 각 황제들의 연호가 묘지에 다 나타났다. 신하들의 묘지에 다 나타났다는 것처럼 고구려, 왕이토 태왕릉비문 역시 도리의 세계인 저는 고구려 역사서라고 봅니다. 비문 내용도 상세할 뿐만 아니라 그 행간을 통해서 고구려 우리 민족문하고 뿌리, 고구려 역사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세태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비문에 나타난 고구리연들의 세계관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왕이토 태왕비를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기 시작한 근본 종기는 물론 11년 정도 관심이 있었지만 그 이후에 아주 근본적으로 제가 몰입한 것은 왕이토 태왕릉비문이 편년체로 되어 있단 말이죠. 8년 8간기. 여기 저는 이게 당연히 삼국사기 안에 이 내용 연예인 다 들어가 있는 줄 알았는데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는 거예요. 삼국사기 광개토왕 본기에 광개토 대항 편년체로 된 내용이 일체 들어가지 않았다는 거.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15개, 13개 편년이 있습니다만 3개의 영락 9년, 14년, 17년이 겹치입니다. 이 겹치는 데에서도 전혀, 내용이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삼국사기 광개토 대항 본기, 광개토왕 본기에는 전부 연나라고 관련한 그런 내용만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광개토 대항 비문에는 그각건 전혀 다른 광개토 대항을 대화할 약장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건 정말 저는 경악했습니다. 이건 정말 이럴 수가 있는지. 그래서 이게 우리 역사가 뭔가 문제가 있다는 시각을 가지고 접근을 했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삼국사기는 철저한 중원 중심적 사대주의사관의 입각에서 쓰여진 겁니다. 거기 보면 앞에 100제와 몇 차례 전투기록이 나옵니다. 그걸 빼면 전부가 연나라와 관계입니다. 연나라에 조공했다, 연나라 장수가 뭘 했다, 특히 연나라가 쳐들어왔다, 어차피 연나라가 폐한 경우에도 연나라가 어떻게든해서 폐해서 누구 도망갔다. 고구리가 이겼던 경우에도 그냥 고구리가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광개토 대항의 동북방, 우리 만조를 비롯한 동북방, 광대한 영토, 그리고 한반도와 외를 평정해서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던 이런 다이나믹한 상황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광개토 대항이 그냥 평범한 군주로서, 아마 광개토 대항은 비가 없었다라면, 광개토 대항은 우리 역사에 그냥 다른 왕못치한 비스단, 오히려 그보다도 모단군주로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를 것입니다. 모르겠죠. 가장 고구리와 관련해서 광개토 대항 비의 특색은 고구리 역사, 그러니까 고구리인들이 보는 세계관은 고조선 영토, 그 축으로 해가지고 비려 거란이죠. 숙신 여진 비려 숙신 백제실라 가라외 동부역까지는 그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그 중심 축으로서 고조선은 옛 영토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 그리고 그에 관련된 기사가 바로 광개토 대항 비문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는 거. 독자적인 세계관이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중국과 관계층 철저하게 부시하고 연나라에서 싸워서 이겼던 경우도 기록 안고 있습니다. 여기 좀 보면 402년, 404년, 원흥 2년, 4년. 이때는 고구리가 이겼는데도 고구리와 광개토 대항 비는 그런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 관심이 없었다는 겁니다. 중국과 대등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여기 보면 천재 지자 1부, 2부, 3부가 됐습니다. 1부에는 천재 지자라는 표현을 씁니다. 주모왕을 천재 지자 황천 지자 이런 표현을 쓰고 역락을 호로 사용한다는 것은 호의 역락 태왕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어요. 이런 것을 무시하고 고구리가 왕 했지, 왕이라고 칭했지 황제라고 하지 않았다. 또 끊임없이 중국에 조궁을 했다. 또 자체 연월을 사용한 적이 없다. 이렇게 중국 학자들, 그리고 일본 식민사학자들이나 학자들은 그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보면 진시왕, 전에는 진시왕의 그 무렵에는 왕하고 황제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묘하고 능도 그렇게 구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 삼국사계에 보면 고구리가 마치 중국의 각 왕족한테 조궁했다는 기사로 도배하고 있습니다. 저는 조궁 안 했다고 봅니다. 친선을 목적으로 한 예물교안이 있었다. 이렇게 봅니다. 그 비근한 예로 역락 구년입니다. 그러니까 황제 토대왕 삼국사계의 본기 구년의 보뇌는 1월에 조궁을 했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2월에 왕이 태도가 불순하다. 그래서 연나라 왕이 모용 힐을 낳아서 3만 대군을 끌고 쳐들어와서 친성, 남소성을 점거하고 5천호를 심고 돌아갔다. 조궁을 해서 가서 그렇게 했으면 바로 다음 달 쳐들어올 수가 없는 겁니다. 저는 이것은 그 당시 고구리가 친선을 목적으로 예물이나 이런 걸 표현했고 예물에 뭔가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쳐들어온 거지. 조궁 앞주가 안 맞는 표현입니다. 삼국사계 광개토왕 본기 구년조회에 보면. 이 고구리오 모든 왕들한테는 저는 연호가 있었다고 봅니다. 김부식이 삼국사계를 완성하고 모두 다 지웠다고 봅니다. 국보 119호 아까 고구리오의 그 금동 술 입상 뒷면에 연가 7년 명이라는 그죠. 연가 7년 명. 이게 좀 국보로 됐습니다. 이 뒤에 지금 이게 표현 여기에 보면 연가 7년 명 나옵니다. 연호도 나오고. 연가 7년 명은 이건 평양에서 만들어서 지금 발견은 경남 쪽에서 발견됐습니다. 지금 일본이나 중국, 어느 왕주에도 나오지 않는 명칭입니다. 연가. 이건 저는 고구리의 독자적인 연호였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이런 게 지금 나와 있어야 하는데 이미 다 없어졌다. 여기 하나에서 이건 조금 학자들에 따라서는 여기에 대해서는 거후반응도 있습니다만 고구리의 사락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남당 박창화가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필사와 유엔 3국업 현년체 역사기로 거기 보면 고구리의 사락에는 고구리 역대 왕들의 연호가 자세히 다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학계에서는 뭐 위서다 이렇게 보고 있다면 거기에 놀라운 사실은 편년체 기록과 그 비문에 나타난 관계투대항 비문에 나타난 역사적 사실이 일체한다는 거. 그렇다면 관계투대항 비문도 유조한 것인가. 역사 사실이 아니다. 저는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걸 제가 다 빚자는 게 아니라 무조건 이런 걸 위서다. 뭐 해서 정사가 아니다. 이렇게 했었는데 정사로 하는 삼국사기. 문제점 몇 가지 한 두 가지만 지적합니다만 정사로 하는 삼국사기가 그런 시각에서 700 몇 년 후에 쓰여진 겁니다만 그래서 이런 걸 이렇게 무시하는 태도로 해가지고 종전에 그 고정관념에 박혀가지고 한치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우리 소위 일제 식림사관의 세뇌된 이런 어떤 학계하더라도 태도 이제는 더 이상 설궐이 없다 이렇게 봅니다. 같이 공동을 장해서 논의를 하면서 어떤 것이 공통분모인가를 차지할 때가 아닌가 이렇게 봅니다. 좀 빨리 진행하겠습니다. 이 삼국사기 역사관에서 이제 저는 광개토대왕 비문 역사관으로 고대사 시각을 바꿔야 한다. 감히 이렇게 주장을 하고 싶습니다. 이 주장하면 사악 여도 아닌 저 친구가 무슨 저런 주장을 할 자격이 있느냐. 저는 그만큼 이 주장을 하기 위해서 많은 자료를 잊고 10여 년간 나름대로 공부도 하고 또 원전도 읽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 비문 있는 그 부분도 저는 세 차례를 탐사를 간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관련해서 많은 학사를 비교해서 연구를 한 결과 이런 주장을 감히 하는 겁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중국 사서 기록을 토시 안 안 틀리고 그대로 옮겨놓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예컨대 전쟁 기록은 광개토대왕 본기만 보더라도 전쟁 기록이 중국 연나라. 주로 연나라 그때는 연나라가 중국을 대표했었으니까요. 중국이 승리한 때는 중국 장수 이름 나오고 또 동원된 병력이 어땠고 전쟁 경과 진행 상황을 어떻게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고구려가 승리한 경우는 한국은 중국을 이겼다. 또 그냥 중국을 침략했다. 13년 기록하면 중국을 침략했는 게 어떻게 됐는지는 안 나옵니다. 한 줄로 딱 됐어요. 출사 침년 이렇게 4대 앞은 없어요. 광개토대왕 본기의 12년 기록인가 13년 기록입니다. 그 보시면 광개토대왕 본기 11년. 아까 제가 말씀드린 11년 보면 연나라를 쳐서 승리한 경우도 고구리의 승리 사실은 기록하지 않고 연나라 장수 누가 모용기가 성을 버리고 달아놨다는 게 급격 입장에서 쓴 겁니다. 그쪽으로 때려 뺏긴 거예요. 중국 역사를 적한 거예요. 이거 어떻게 보면 분통이 터질 일이죠. 중국 사설하는 것은 특히 주변 국가와 관계에 있어서는 자국에 불리한 이러한 역사 사실은 축소하거나 외국하는 게 중국 사서의 이게 전형적인 이 사람들 사구입니다. 그래서 오직에 쓰면 단제 신체원 선생 이런 얘기를 했어요. 소위 충추필법 중국의 역사 기록 원칙이죠. 충추필법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자국에 불리한 것을 은폐시키는 곡필을 뿐이다 이런 지적을 조선상으로서 하고 있습니다. 단제선생님. 또 연암 박지원은 11개에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조선은 그 옛 땅을 싸우지도 않고서 스스로 축소시켰다. 보면 이건 그 연원이 바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비롯되어가지고 우리 당시 그 당시에 선비들도 그걸 그대로 믿고 있다는 것을 한탄하면서 한 얘기입니다. 당시 고구리어인들의 의식 속에는 중국 왕조, 유진 남북조 시대에 가지고 유진 앞에 이쪽에서 어떤 왕조는 30년, 20년, 30년, 40년 동안 진행되다가 없어지고 사라집니다. 이런 식으로 수십 년 단위로 명배를 하는 이러한 어떤 중원 후과 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확마리도 피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걸 반증하고 있지 않느냐 이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그 고구리인의 세계관을 통해 연장선상에서 장수항 평양천도가 이어졌고 또 실라 삼국 통일도 이루어졌다. 그 역사적 의미를 제가 다른 지각에서 한번 반췄겠습니다. 새롭게 한번 주장을 해보겠습니다. 저는 장수항 평양청도, 장수항이 지기하고 나서 15년 427년에 이루어졌죠. 이 평양천도야 말로 한민족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다. 제 일대 사건이다. 저는 이렇게 주장을 하고 싶습니다. 그 당시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옵니다. 한반도의 중심 중인 평양. 또 일부 죄하 사악들 중에는 이때 평양이 전력 요령성 요령이다. 이렇게 또 주장하는 학생입니다. 이 문제점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평양으로 옵니다. 여기에 대해서 일부 학자들 중에는 고구리가 원래 진추적이고 대륙지향적인 그런 역사 있는데 고구리의 사가 이로 인해서 반도로 들어오므로서 소극적이고 내륙지향적인 역사가 돼서 우리 민족의 역사가 유축되는 계기가 됐다. 이렇게 주장하는 그런 학자들도 있습니다. 물론 일리가 있죠. 지금까지 우리도 그렇게 봐왔습니다만. 저는 이 장수왕의 평양천도야 말로 우리 한민족의 아이덴티티. 정체성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봅니다. 이 장수왕은 그 당시 부기족. 토착기족 세력의 유세를 누르기 위해서 남쪽으로 옮긴 것도 전혀 아니라고 합니다. 이때가 고구리 역사의 최전선기라고 전환되어. 최전선기에 옮겼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라고 봅니다. 고구리 역사 망할 때 지금의 환인, 환도, 환도성, 흙성골성이죠. 거기다 또는 국내성, 집안 또는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요양. 평양이 지금의 요양이라고 할 때 거기서 망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렇다면 고구리에는 우리 한민족의 문화적 전승체로서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봅니다. 현재 타구구 영토가 되어 있는 공간 범인회에서 흙망성소한 문명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 민족이 과거에 참여했더라도 그것은 그 나라, 중국의 주변 문명, 그 변방 영토에서 명명에 대한 주변 문명에 불구하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예컨대 트루프, 토크기족, 트루프 좀 돌걸족이죠. 과거 그들이 참여한 중앙아시아 국가, 서역이나 중앙아시아, 중국 서역까지도 참여했었죠. 서역이나 중앙아시아 국가에 대해서 그 문명에 대해서 지금 어떤 영국권을 주장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트루프는 이 국가 권리비를, 터키는 국가 권리비를 터키공화국 권국 기념일을 552년으로 봅니다. 1952년도에 터키공화국 권국, 터키 권국 1400년 기념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건 오스만 제국이 1299년에 성립된 것, 그때보다도 훨씬 더 소급하거든요. 이건 이때 돌걸족의 장수, 토문이라는 장수가 유연을 멸하고, 유연이라는 몽골족 일종이죠. 수장을 사살겠다는 기사가 차치통감이 나옵니다. 552년에. 이 돌걸이 바로 트루프족이고 유부러족 분파가 되어지면서 오늘날 터키족입니다. 그런데 터키는 바로 이걸 자기들의 민족사로 풉니다만 아직도 주장을 안고 있어요.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진 때는 지금 아나클리아 반도가 아닌 중앙아시아 일종의 알타이삼의 부분이죠. 그래서 터키에서는 국산은 바로 민족사를 의미하고 돌걸족의 역사. 그리고 터키 내에서 명렬했던 히타이트족, 아랄라트족, 프리기아족, 비잔틀 제국까지는 세계사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효과세곤은 그렇게 되어 있어요. 고구리원은 정치적으로 멸망했지만 평양천도를 통해 우리 민족 망할 때 평양이 있을 때 수도였기 때문에 지금도 평양은 우리 지금 한민족의 영토니까. 그래서 하나의 우리한테 확관과 민족적 유산을 남겨놓고 있다 이렇게 봅니다. 고구리원은 평양천도 이후에도 요섭 지방, 요동 지방에 남공불락을 쌓고 경계를 개혈리지 않은 것은 역사적 기록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연후로 인해 저는 평양천도로 인해서 고구리가 망했기 때문에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이 일을 제기할 수 있는 하나의 기반이 된다. 그래서 장소하고 평양천도를 저는 아주 우리 역사상 제 일대 사건이다. 이렇게 저는 주장을 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깊이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김룡옥 교수가 중국 일기라는 책에서 저와 같은 생각을 쭉 늘어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주장이 독창적이다. 이걸 강조하는 그런 게 아니라 책을 제가 논급을 했습니다. 보면 여기 보고서 인용을 했습니다. 여기 제가 인용을 해놨습니다. 중국 일기. 그 다음에 저는 또 하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 신라 삼국통일을 재평가자. 저도 과거에 볼 때 신라 삼국통일에 대해서 우리 민족이 오히려 축소되고 또 역사가 상당히 위축된 외소하게 되면 그런 결과가 아니었느냐.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고구리가 삼국을 통일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당시 고구리가 통일했으면 중원까지도 충분히 진출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아쉬워를 합니다. 우리가 가령 고구리가 통일해서 중원을 진출해서 중원을 지배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중원은 어디입니까 중국에. 한 함성을 중심으로 한 중원을 지배하는 자가 천하에 지배한다고 그랬죠. 그건 거기에 앉아 있는 문화적 용광로라 옵니다. 정말 멜팅파십니다. 그 안으로 들어간 어떤 민족이든 거기에 다 흡수되어가지고 동화되서 거의 지금으로서는 다 하나의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는 겁니다. 북이 선비족이 그랬고 이 나라의 거란족이 그랬고 그 나라의 여진족이 그랬고 이 원나라의 몽불족이 그랬고 청나라의 만주족이 그랬습니다. 아마 트루크 제국이 트루크가 돌걸족이 중국까지 중원까지 점령해서 한 때 그걸 지배했다 하더라면 오늘 트루크 제국이나 오수만 제국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저는 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고구리가 통일해서 중원을 한 때 지배했다 하더라도 그 당시에 뭐 얼마 동안 지배를 했을지 몰라도 지금 보면은 그 당시 고려 제국, 조선 제국을 했다 하더라도 지금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고려성이나 조선성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중원이라는 게 그런 곳입니다. 중원이라는 게. 그래서 변방의 신라에서 통일했지만 고구리의 세대인식인 고조선 축을 형성하면서 우리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켰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독자적 역사행부 시작이 신라에서 삼국 통일에서 시작이 됐다. 저는 민족사적 의의가 있다. 새롭게 평가를 하고 싶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만은 함석훈 선생님 같은 경우는 상당히 애석하게 당시 고구리 같은 경우에는 했어야 한다. 이렇게 주장을 하고 계십니다. 뜻으로 본 한국사에 보면은. 저는 고조선 축을 중심으로 한 고구리여의 이른바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 문제를 볼 때는 이렇게 봐야 한다. 이렇게 봅니다. 다음에는 비문의 근거에서 몇 가지 전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좀 간략히 말씀을 드리지요. 비문은 1부 2부 3부로 되어 있습니다. 1부는 고구리여가 어떻게 건국이 됐고. 다음은 충황부터 유리왕. 대주류왕. 광개토대왕이 지귀해서 그 사이에 이르는 과정을 고구리여인들의 자부신 넘치는 그런 표현으로 써 있습니다. 2부가 광개토대왕의 치적을 기록한 겁니다. 광개토대왕의 치적을 기록하는 2부는 치빈하게 되어 있습니다. 3부는 이른바 수묘인제도입니다만 우리는 지금까지 광개토대왕 능비 연구하면 2부의 광개토대왕의 치적 중에서 그 중에서도 특히 이른바 영락 6년기사. 백 잔실라 구시 송민. 유래조공. 이외이. 신며년 내 도해파. 나 이외이신 민. 32자 해석이 모든 것인 줄 알고 거기에다 매다졌어요. 그러면서 이걸 유리하게 하거나 분리하게 하기 위해서 별의별 온갖 취해를 살차나 냈습니다. 그리고 또 논문으로 치면 100편 이상 나왔을 거예요. 책도 몇 십 분 나와 있고 지금도 계속 나오고 있어요. 그런데 광개토대왕 능비는 그것도 중요하지만 치적 중에서도 다른 부분 1부 3부도 아주 중요하다. 그 한자 한자의 행간에 보면 정말 거기에서 고구리 역사를 다시 봐야 할 그런 내용들이 나오는데 몇 가지만 제가 얘를 들겠습니다. 좀 이따가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대한 비문은 8개. 아껴 말씀드린 대로 8개 8년 8간지로 되어 있습니다. 이게 몇 년 영락 몇 년 몇 년 해서 영락 6년 하면 병신년 이렇게 나가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면 아주 논리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두 태왕이 출정하게 된 이유 전쟁 명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정 이후 그 다음에 출정 후 경우 왕이 직접 참전한 경우는 중소리라는 대로 있습니다. 그리고 왕이 중사를 파병해서 치게끔한 경우는 교견 가르쳐서 파견한다. 이렇게 쓰고. 그리고 이건 말하자면 출정 후 그 다음에 마지막은 전쟁 결과를 나타냅니다. 상대를 격표한 경우는 어떻게 해서 성을 얼마 탈출했다. 이런 식으로 다 되어 있습니다. 영락 5년 경우 비례가 부단이 침입함으로 왕이, 친이, 군사를 이끌고 토벌해서 성을 합락시키고 산천을 경계 지역을 돌고 돌아왔다. 영락 6년. 마찬가지로. 10년은 다시 또 설명을 하고. 영락 9년 10년. 이렇게 타되었습니다. 영락 9년 10년에도 100대가 외화화통에서 신날을 침략하자. 이를 파병해서 격파하고 신날을 구어놨고 돌아왔다. 이렇게 되어 있고 영락 14년 대방지역 평정한 거. 영락 20년 동부여가 조금 해 왔는데 배반해서 조공을 안 했기 때문에 직접 왕이 군대에 끌고 출정해서 토벌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영락 8년하고 17년 비문을 보면 전쟁병분이 생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판도기 불가합니다. 17년. 8년은 생각되어 있고. 그렇지만 전체 맥락을 볼 때나 또는 문맥 전후볼때 뜻을 파악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이게 하나하나 비교해 보면 글자 몇 자가 결자가 있었다. 또는 불명확하다 해가지고. 이를 채워놔 가지고 전체를 왜곡하는. 이러한 저는 바람증이 아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1400년 비가 세워진 지 1460년 1880년에 발견된 걸로 우리가 지금 보통 보고 있죠. 1460년이 지난해에 발견됐습니다. 따라서 비가 발견된 최초부터 비문의 상당 부분. 어느 부분이 이미 훼손되어 있다고 봅니다. 옹과 풍상을 겪으면서 이 비가 살아남은 것만 도 천만 다행이고 문화 대형맹 때도 어떻게 살아남은 것도 천만 다행이죠. 그런데 이걸 이런 것을 도요시하고. 이걸 소동을 발라서 원문을 가렸다면 훼손시켰고 또는 석교 도마를 했다. 또는 그 위에 벗겨진 업무는 다시 낫다. 이렇게 하면서 여러 가지 주장도 합니다만. 저는 이것은 최초 발견 시 완벽한 비문이었다는 걸 전제로 하는 겁니다. 최초 발견 시에 이미 아까 268자가 마모 됐다고 했는데 거의 이쪽은 그때부터 마모가 됐다고 저는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몇자 안 보이고 이것을 억지로 채워놓고 뭐 하는 그리고 석교 도말론 이런 것은 큰 저는 의미가 없다. 다음에 이제 그 말씀하는 역락 6년 기사를 제 입장에서 제 입장이 아니라 이미 나와 있는 그 기 중에서 제가 취한 그 입장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이 백 잔실라, 백 잔실라 구시 송민 유래 조공 이 외위 신묘년 내 하고 끊어야 합니다. 도해 파 끊고 백 잔 뭐뭐 뭐뭐 나 신나 이위 신민 이 6년 병신 왕궁설 수군 토리 잔구 58성 7,700 장. 장, 잔왕, 재, 병, 대신, 시빈, 선비, 환도 이게 완전한 기사입니다. 그 중에서 이 해석은 이미 정인모호선생원 해석을 원본으로 삼은 겁니다. 백 개와 신나는 오래전부터 고구리의 송민들로서 조공을 받지 왔다. 그런데 외과 신민연에 우리를 침입하기 때문에 광개토 태왕께서는 바다를 건너가 그들을 격파했다. 그러자 백 개는 다시 신나를 침공해서 그들을 백 개의 신민으로 삼았다. 전쟁 명분을 여기 들어가 있습니다. 전쟁을 하게 된. 이런 이유로 해서 이 자가 들었습니다. 여기 보면 이 자. 이런 이유로 해서 영락 6년 병신년에 대왕께서는 친리 수군을 건너리거나 나가서 축정을 했다. 그래서 총을 58개를 빼앗고 700촌을 또 전령했고 그리고 백제와 왕의 왕의와 신명을 볼모로 해서 다시 국내성으로 개선하였다. 이게 전쟁 결과입니다. 전쟁 분명히 명분 또 출정, 직접 풍솔입니다. 그 다음은 전쟁 결과입니다. 이 기사는 32자만 모든 게, 이 32자는 전체 백라구, 군연화 역사에서 사실로 모아서 이와 같이 전화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10년년, 여기 보면 10년년 이래에 이 기사는 독립증 기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원래는 이 6년 병신하고 왕 풍솔 이 사이에 들어가야 할 기사입니다. 이때 어떻게든 이유로 왕이 직접 출정을 했다. 여기에 들어갔는데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앞으로 뺀 겁니다. 이 비문을 지은 사람, 기자가서 가까운 상당히 문학성을 발휘한 기사입니다. 왜냐하면 외치게 되었는가 그 이면을 여기서 치는 겁니다. 백재가 약속을 어이고 신란을 다시 짐해서 신민으로 삼자 백재를 치지 않을 수 없게 된 이유를 말하는 사비기사입니다. 그래서 왕의 친이 나갔다. 여기서 보면 이가 나오죠. 이 병신 6년, 이의, 여기서 이라는 것은 따라서 또는 그래야 접속사입니다. 따라서 외치게 됐냐. 그래야 6년. 6년. 네, 직접 치게 된 그 이유를 여기에 기록한 겁니다. 여기 내도 해파는 내와 도는, 여기서 내 자 도는 전부 다기 되는 본동사로 봅니다. 중국사는 내에서 끊어서 있고 외가 들어왔다. 그러자 도해파 바다를 가서 붙이렸다. 여기 도는, 여기 주어가 고구리옵니다. 비문 전체를 보면 주어는 항상 숨어 있습니다. 바다를 건너서 격파했다. 내와 도, 주어는 외구 하나는 고구리옵니다. 앞에 도는 내는. 이걸 만약에 일제에 관변 사악지 않아, 또는 제가 이 표현을 강단 사악 동일체 원칙에 외물된 학사라고 치면, 이것은 우리 이덕일 교수님이 이 표현을 써서 제가 원형을 했습니다. 강단 사악, 외과 신민원에 바다를 건너 백잔 신날을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이렇게 보통 회사 간다면 영락 6년 기사는 광개토대왕을 출병, 머문사, 외를 채아지요. 이놈들이 외가 말이죠. 채아는데, 어째서 바로 백제를 치는지 논리적으로는 안 맞습니다. 역사 사실에도 그렇고, 박재상 열쇠에 보면, 이 박재상은 광개토대왕이 활약했을 때 연대를 같이 합니다. 박재상 열쇠에 보면 외가 고구리옵, 고구리옵 군대가 신날을 침파했다가 외를 만나서 그들까지 다 격파했다. 이런 기사가 나오는데 아마 이 기사하고 맞아떨어지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입니다. 이 해석은 우당, 아니 우당이 아니고, 이 위당, 위당 정인보 선생의 1941년에서 아마 이 분야에 휴실 겁니다. 광개토 경평한 호태왕릉 비문석략. 거기에서 처음 주장했고, 북한학자 박시영의 광개토 왕비에서 주장을 했습니다. 도월의 중국일기에도 약간씩 해석은 다릅니다만, 저도 원용을 하면서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만, 제가 최근에 나온 해석 중에 하나, 주목할 만한 해석 중에 하나가 제아사학자인 정재수 작가가 비문기사를 새롭게 해석한 것에 주목을 하고 싶습니다. 비문에 나오는 100장과 장국을 구분하고 있어요. 비문에는 100장이 5번, 장국이 3번 나옵니다. 명확히 비문도 구분하고 있습니다. 100자는 한성 100제를 말하고, 장국은 부협 100제를 말합니다. 이렇게 또 주장을 합니다. 도와 해를 구분해서 도는 건너또짜는 강이나 하천동, 소비모도 소비모를 건너가는 것이고, 해는 바다를 건너가는 것이다. 이렇게 전재를 하고, 외를 여기서 바다를 건넣는 게 아니라 한반도에 존재하는 부협 100제, 그 일당들이다, 잔당들이다, 이렇게 보급을 다 도울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태왕이 토벌한 것은 부협 100제를 들한다. 그리고 이 역락 6년의 부협 100제가 멸망하니까, 그 후회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외국, 야마토를 건국했는데, 이때가 10년 연기, 그렇기 때문에 10년 연기적으로 소급해서 기록했다. 이렇게 주장을 합니다만, 이 내용은 경청할 만한 내용도 아닌가, 이 하나만 제가 다른 학자대로 해석은 농급을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광개토대왕 비문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왜,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10번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00제, 신란은 아까 5번, 3번인데, 이 왜를, 단순한 우리가 해적 집단인, 이걸로 봐야 할 건지, 저는 한반도 판세에 영향을 들 수 있는 만반치 않는 세력이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 입나 일본 부실체, 그 유무가 아닌 그 실체, 그 본질과 기능이 무엇인지, 우리가 한번 후회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왜를, 이 귓수 지역의 한정적인 존재이로 볼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 고대사의 일부러 아예 편의업을 쉽게 할 것인지도, 이 비문을 보면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혹시 왜가 100제나 가야가 일본 열두에 진출해서 세운 분국이 아닌가, 그리고 일본을 지배한 하나, 관제탑이다. 그걸 일본, 사람들이 일본 역사관점에서 나중에 본국과 단제로 되고 볼 때, 이걸 가야가 멜망하고, 100개가 멜망할 때, 그 위에 이걸 마치 자기들이 경영했다, 이렇게 본 것이 아닌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일본 서기에 보면 마치 그렇게 한 것처럼, 그래서 입나 일본 부, 남성 경영서가 나오는데, 이 가야가 100개인들이 건너가서 망하고, 본국과 완전히 단제로 됩니다. 거기 일본 사회의 주류세역으로 편성되면서, 일본 서기를 편천하면서, 자기들이 하나의 주도권을 잡는 걸로, 일본 서기를 편천해서 그렇게 주장하지 않느냐,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세계사적으로 볼 때도, 이 1066년에 노르망디 공국이, 노르망디 공국의 재후였던 윌리암공이, 바다를 건너서 영국으로 건너갑니다. 바로 그 프랑스 조회안, 영국으로 건너가서, 이른바 영국을 정보를 하고 나라를 세웁니다. 이게 바로 윌리암의 영국 정보로부터 이때부터, 영국이 노름만 하던 겁니다. 그러면서도 이 윌리암 가게, 노르망디 를 그대로 놓고, 망하지 않게 꿈하고, 같이 이렇게 역해서 살아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프랑스하고, 영국하고, 역사가 아주 복잡하게 얽히면서, 장미전쟁이 100년 일어났습니다만, 그런 역사적 실례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건너갔지만, 일본 사회의 주류세력이 된, 도레인들이, 우리 역사를 보면서, 서기를 펜치하나, 일본 서기를 펜치하나, 그러지 않았냐,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김석형, 북한 학대, 월보라한 북한 학대, 대단한 학대가 열렸습니다. 김석형은, 이론 중에, 이, 금국설이라는 게 있습니다. 사만 및 사국시대의, 일본열도의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식민지가 존재했다고 주장을 합니다. 식민지가 존재했다. 그래서, 가령 인나일본부도, 일본에, 가야인들이 건너가서 세운, 식민지였다. 그리고 그 위치를, 인나일보 위치를, 지금은, 옥아야마, 아주 위치까지 특정합니다. 옥아야마는, 그 당시에는, 지금은 교토부로 해서, 동해로 막혀있습니다만, 교토부가 그 위치 부분을 차지합니다만, 그 당시에는, 터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의 기록에 보면, 인나일본부 북쪽에는, 파다라고 그랬어요. 근데 그 지금, 인나일본부를, 우리 일본, 일본 관병사학자들이나, 이 사람들은 시장은 대로 하면, 파다가 아니잖아요. 북쪽이잖아요. 우리 육지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 분국서를 뒷받침하는 것이, 오히려, 광개토대왕 비문에, 외의의 실체를 우리가 밝힘으로서,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입니다. 다음에, 광개토대왕과, 생몰련하고, 능비 건립식이,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이,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이 삼국 사기에는, 광개토대왕이, 392년에 지기 위해서, 413년에, 3화한 걸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비 위에는, 391년에, 지기 위해서, 412년에, 3화한 걸로 되었습니다. 이, 삼국 사기에는, 그, 우리 그 왕의 연령에 관한 기록은, 전혀 안 나옵니다. 이, 무령왕 지속에서, 비롯어 무령왕, 63세로 기록됩니다만, 여기서, 그, 광개토대왕은, 이, 재유연수하고, 연령은 삼국 사기나, 광개토대왕 등 비문이 일치합니다. 그런데, 지균이, 틀려요. 그래서 우리 교과선아, 다른 책에 보면, 되게, 양쪽을, 뭐, 혼용하다가, 삼국 사기를 따라가지고,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392년에 지기해서, 413년에, 3화한 걸로 하고, 능비는, 414년, 광개토대왕이, 3화한 걸로 하고, 광개토대왕이 사망한, 다음, 바로 다음에서, 이렇게 다, 다 됐습니다. 교과선아. 그런데 저는, 앞으로 삼국 사기, 기록은, 능비에 기록된, 그 연수로, 반드시 바로 잡혀지야 한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그러고는, 왜 그런, 차구를, 이렇게 했느냐, 그 차구에 관련해서, 저는 그, 쭉, 공부를 하다가, 박시영, 그 광개토대왕, 능, 광개토대왕은 비해, 저는, 그 상당히 설득력 있게 써놓고, 제가 봐도, 그죠, 그렇게 봐야 한다고 봅니다. 이, 정확하게는, 광개토대왕이, 이 410, 391년도에, 지기해서 412년, 사망했는데, 이 사망이, 392년도, 왜, 후반기 아닌가, 10월이나, 11월, 12월 이때, 얘가 아닌가, 그리고, 장소항은, 그때 지기를 하는데, 칭, 그러니까, 지기, 칭원이 원칙입니다. 그 고대사, 지기 완회를, 원년으로 봐가지고, 장소항이, 392년에, 지기를 했으면은, 390, 390년, 412년에 지기를 했으면, 412년이, 장소항 원년이 되는데, 그래서, 광개토왕 비문도 410년이니까, 다음, 다음에 이렇게 세워졌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 보면은, 예유가 있습니다. 이, 그 왕이, 그 듀오 왕이, 그 왕이 사망한 때가, 그의 연말, 알이 들면은, 그 듀오 왕은, 그때 원년으로 않고, 그 다음 애를, 다음의 1월부터, 원년으로 증하는 얘가, 아, 있었다. 이 장소항이, 491년, 12월에, 사망하자, 전자맹왕이, 그 다음 애를 원년으로 했고, 실낮, 첨해왕이, 12월에 죽었습니다. 15년, 260년, 12월에 죽었는데, 그 다음 미추항이, 그 이듬애를 원년으로 한, 예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광개토대왕도, 310, 412년, 말경에 사망을 했기 때문에, 장소항은, 413년부터 원년으로 했다. 그리고 나서, 그렇게 되니까, 다음에 바로 세워진 걸로 들고, 3, 4개의 연수와, 다 맞아떨어진다. 저는 이렇게 보고, 이 설이, 설득력이 있다. 이렇게 보고, 저도 여기에, 찬동을 하고, 또 이렇게 하는 것이 바람찍하다. 이런 말씀 드리겠습니다. 또 하나, 이 얘기는 제가, 이, 고글의, 초기 도업지에 관련해가지고, 지금 그런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능비가 서 있는 장소와, 그것을 세운 연대가, 이, 수합하는, 그걸 지금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지금 국내성 동쪽 교회, 시벨이에 있는, 있기 때문에, 능비가 세워진, 그 장소하고, 그것을 세운 연대가, 부합한다는 것을, 능비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고글의, 도업지가, 국내성인, 집안 일대였다. 이런 것도, 이 능비로 저는, 충분히, 비정이 아니라, 이걸 확실하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이학 관련해가지고, 고글의 초기, 도업지인, 흙성골성, 흙성, 또는, 절본이라고 다죠. 그리고, 환도성이나 국내성 등이, 지금은, 5년산생이라고, 정말, 중국국, 환인이나 집안이 아닌, 요동지역에 있었다. 이런 주장이 있습니다. 요동지역은, 지금은, 요동지방보다, 훨씬 더 서쪽에 있었다. 또, 이설은, 5년산생이나, 집안에 도업했다면, 호대요동인, 지금은, 하북성, 나나지역이나, 천진 일대를, 공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집안은 너무, 공격하고, 유진 곳에 있어서, 요화동서를, 탓쓸이기가, 상당히 어렵다. 이런 주장들을, 표고 있습니다. 저는, 이걸 보고, 저도 처음에는, 그럴뜻하게 여기였습니다만, 직접 탓서하고, 여러가지를 고려하셔서, 본 결과가, 그렇지 않다. 이렇게 봅니다. 고구래가, 지금의, 요화 서쪽보다도, 훨씬 더 광대한, 서쪽 지역을, 영토로 하고 있다는 것은, 명평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수도가, 환이나, 집안에 있었다고 해서, 요소지역을, 공격할 시리기, 없어졌다. 또는, 수도가 치우쳐 있어서, 치우쳐 있어서, 이들 지역을 탓쓸이기가 어렵다. 이런 주장은, 수강이가 어렵다고 봅니다. 오히려 고구려는, 요소지역의, 그, 광활한 지역을 중심해서, 철배팟은 성을, 곳곳에 세웠죠. 안시성, 이런 쪽 성을 말이죠. 평양천도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국내성, 한도성, 특히 국내성 도급진은, 중원 세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오히려 그대로 침략을 막는, 천혜의 방어 요새, 역할을 했다. 또, 그런 주변이, 군벽하다고 합니다만, 직접 가서 한번 살펴보십시오. 저는 갈 때마다, 아침 새벽에, 한 4시, 뭐 5시쯤 일어나서, 그 주변을, 한 2, 3시간을 꼭, 산책, 쭉 탑살을 했습니다. 혼자. 그러고 보면서, 아 정말, 이건, 천혜의 도급지다. 이 북서쪽은, 정말 철벽같이, 산맥으로 막아져 있습니다. 남쪽은 암놋광이, 해줬고, 오히려 천혜의, 요새지다. 도급지로 삼기에는, 더없이, 적당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무슨, 식량, 도급지가 있느냐. 이, 아까 그, 제가 사진에서, 그 보여지는대로, 바로 그, 집안, 관계투세왕능비나, 관계투태왕능, 장군총이 있던, 앞에 바로 암놋광입니다. 뭐, 100m도, 100m, 200m 안 되는, 그 암놋광이, 흐르면서, 암놋광을, 그냥 말로, 말하자면, 동래강이에요. 이게 국경이 아닙니다. 국경지대, 국경, 바로 그, 평안도, 한, 말, 한반도고, 평안도, 산 넘어가면, 평화적이 나옵니다. 그걸, 바로 배우로 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부래가, 중원보다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고조선, 축을 생각하면서, 그 어떤, 민족적, 정체성을, 생각하고 있다는, 이런 점에서 보면, 이, 고부래요, 이, 도읍지가, 저는 아주, 거기에, 한, 400년 동안 있었던, 도읍지가, 저는, 정말, 천혜의 요사였다, 이렇게 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그, 환도산성, 예서 보면, 보면, 많은 무덤대가 있습니다. 그, 장, 장엄하죠, 정말. 이거, 그, 그보다 더 많은 무덤대가, 지금 암놋광, 건너서, 북한 지역에 있다는 거예요. 그건, 북한은 지금 암놋광을, 사회해서, 지금, 한강처럼, 왕내가, 그냥, 그, 그, 고을이었다는 겁니다. 이, 단재의 선생이, 막명길에 올라서, 제일 먼저 갔던 곳이, 서간도, 고를 들러 가지고, 이쪽, 그, 이, 환인에서부터, 고조선 부여, 이쪽에서, 집안지역을, 둘러보고, 한 얘기했습니다. 삼국사학이, 만 번 있는 것보다도, 그, 집안 유적지가서, 한번 살펴봐라. 거기서, 역사의, 어떤, 느껴봐라. 아, 저도, 이건, 마찬가지라고, 저도 같은 생각이, 느꼈기 때문에, 그 때문에, 마치, 단재선생을, 아니, 단재사학을, 펴매하는 입장에서, 가서 그런 걸, 또, 제대로 보지도 않고, 뭐, 그게, 펴매하곤, 어, 그런, 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건, 뭐, 사수한 겁니다마는, 고그리 왕명표기는, 사수한 것인답니다마는, 교과서의, 뭐, 삼국사학이에 따라가지고, 어, 이, 동명, 그죠, 동명성왕, 뭐, 유리명왕, 대무신왕, 이렇게, 교과서에서, 펴가 됐는데, 맺기 비문에는, 추모왕이라고 되어 있고, 유류왕이라고 되어 있고, 대주류왕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체합니다. 비문이 정확하죠? 그 뒤에 뭐, 중국인들이, 나온 사수에서, 이렇게 했다, 뭐, 이런 걸 가지고, 뭐, 이렇게 하는 것보다도, 교과서도, 어, 그걸로, 비문에 따라서, 고체한다고 이렇게 봅니다. 그리고 비문에서는, 광개토대왕을, 17세 손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마는, 통상, 추모왕 17세 손이라고, 이렇게, 새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학에 나타난, 역대왕대로, 자연스럽게 됐을뿐만, 그럼은 13세로 나와 있습니다. 새해 보면은, 그래서 양쪽이, 누락 있는 건 아닌지, 삼국사학이와, 고구리어 본기의 왕대수에, 누락 있는 것은 아닌지, 몇, 몇 대가 빠져 있는지, 이런 생각이 듭니다. 대주류왕으로부터, 17세 손을, 뜨다는 것은 아닌지, 이것도 한 번 더, 어, 연구를 해야 할, 어,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다음에 이제, 역락 20년, 동부역 관련 기록 제조음영은,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이 부모는, 생략을 하고, 이 부분도 지금, 백기 비문에는, 북부여, 동부여하고, 이건, 부여라는 표시가 없는데도, 이걸, 사선을 동원해가지고, 뭐, 여러 가지로 표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비문을 운영을 따라서, 어, 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또 하나는, 그 동부역 강역과 관련해서, 어, 동부역 강역과 관련해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또 광개토 대왕의, 정보 법적을 평가하는, 역락 20년 기사, 말매에는, 태왕이 공격해서, 격파한, 성이, 말매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 격파한 성이, 64곳, 초니 1400곳으로, 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건, 북부려가, 동부여로부터, 이제, 탈출하는 성을, 저는 잃은다고 봅니다. 그만큼, 동부여가, 어, 북력이 광대하고, 광대하고, 성성의 성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 동부여는 그 외에, 그, 장수와, 다음 왕인, 문자명왕 때, 고구리에 이제, 흡수가 되죠. 대부분의 우리나라, 어, 교과서나, 교과서나, 참고서에 보면, 이렇게 되어왔습니다. 광개토 대왕이, 총, 제의 중에, 총, 그, 일생 동안, 그, 탈출한 성이, 64성이고, 1400종이다. 이렇게 많이, 그, 나와 있습니다. 영락 6년부터, 쭉 해서, 100대로부터 탈출한 성이, 50, 근데, 그, 사실, 부합하지 않습니다. 우선, 그, 비문에 나와 있는, 이것만 봐도, 영락, 6년 병신원정에서, 100대로부터 탈출한 성이, 58곳, 그 뒤에, 비리어, 가라, 동부여부터 탈출한 성들, 그래서, 이름이, 명기 등배들만, 그리고 또, 수묘인 연호하고, 이렇게 맞춰보면, 그 부분에서, 신뢰한, 새로운, 한인과, 예인들, 이게 주로, 백제나, 가라 출신들, 이들을 합산한 것만으로도, 7,80등이, 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제, 중복등을 빼더라도, 그래서, 관계툴 대항이, 총, 그 동안, 그, 일욱한, 그, 빼앗은 성이, 64곳이고, 총이, 가라, 그, 흐르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다음에, 이제, 마지막, 부분에, 수묘인 제도는, 가볍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간, 비문, 제3부의 수묘인 제도는, 상당히, 소월히 연구되고, 여기에 대해서는, 뭐, 해석도 제대로, 안하고, 적당히, 그냥 둘러붙여서, 이렇게, 하는, 그런걸 많이 봤습니다. 그러나, 이 수묘인 제도야말로, 고구리의, 호도 member, 우리가 여기에, 이 행간에, 엄청난, 고구리의 역사의 비밀이, 숨겨있다, 하고, 저는, 그런걸 느꼈습니다. 제가 볼 때요, 이, 능비에서는, 수묘인 연우명단을, 전부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것이 어떤, 준치계획이기간 것인지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능비를 세우게 된, 사정, 능비역 관리집진 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연, 30가, 가년 300가, 도학 330가로, 구성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제, 연우라는 것은 아마, 그 당시에, 민과, 민호의 뜻으로,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이게 나옵니다. 가장 오래된 용래는, 바로, 명문으로 나와있는게, 광개토 태왕룡비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묘인 제도에 대해서는, 묘를 지키는 사람, 바로, 그러면 묘직이, 능찬봉 제도 정도로, 가볍게 죽임했습니다. 평가절해왔습니다. 그러나 수묘인 제도는, 단지, 능미를 관리하는 차원이 아닌, 왕릉의 신성성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고불의협의 사유조직이다. 아주 시스템에, 사유조직이다. 이렇게 봐야 합니다. 2012년에, 압록방, 지루인 마서나강변에서, 발견된, 이, 집안 고불의협이, 이, 주 내용도 전부가, 수묘인 제도입니다. 그래서 어느 특정 왕릉에 대한, 수묘가 아닌, 방개토 대왕, 그, 이전에도, 이 수묘인 제도가, 고불의 사유 제도를, 전속하고 있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수묘인 제도는, 태왕의 정복사업에 의해서, 확대 유지되었던, 고불의협, 왕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 부지롤, 만들고 있다. 거기에 하나의, 그, 졸려 근거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성도가, 상당히 중요성을, 오늘, 간과할 수 없다.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이, 이제, 구견 이루에 대해서, 간연 15시 폐정된, 이 수묘인 제도는, 고려 조선시대의, 병역제도, 노비제도, 등, 구격제도에 근가해 됐습니다. 그리고, 고불의협 일반 국민들은, 여러 가지, 병역음우나, 복무제 도에서도, 이게 활용이 됐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집나라 상황이, 계약했던, 그, 계약됐었던, 보다도, 더, 이, 방대한 단어로서, 연대 책임제, 사회조직, 이게 아니었는가, 이렇게 해도, 생각을 합니다. 이 수묘인 제도의, 명단은, 요동으로부터 한반도 내 각, 기어 개혁까지, 분포되어 있습니다. 구구의협 토의, 광화라모가, 이, 광화라모가, 특히, 비문, 이부, 역락, 6년 후, 지적기사당에, 나타내는 각성의 명칭이, 수묘인 연옥의, 아주 체계적이고, 정확하게, 맞았다 러집니다. 이, 비문 자체가, 그리고, 수묘인 연옥을, 출신지방배로, 기록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동시, 각성에서, 데려온 수묘인들, 한, 실내 한해, 새로 정복한 남쪽, 백대지역이 들지, 여기서 데려온, 실내 한해, 가, 220가이고, 구민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구민, 이게 상당히 의미가 큽니다. 구민, 이 책가, 알을, 이 사람들을 어떻게, 보구리역 왕족까지, 오게 되었는가,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매구역에서, 남소성에 이르는, 14개, 지방에서 온 연옥, 뭐 들은, 옌영토에서 왔다 해서, 구민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구민은, 보구리역은, 가까운 저, 보구리역 구민들, 뿐만 아니라, 멀리, 이 영락, 그때가, 9년 이지요. 삼국사기에서, 9년의, 기록, 9년으로 나와 있습니다. 영락, 9년의, 이, 이, 이, 이, 이, 이, 이, 이, 이, 이, 이, 이, 이, 이, 이, 이, 이, 이, 이, 이, 정복, 고구리의 성을, 이, 이, 고구리를 침략해서, 뭐, 5천호를, 옮겼다, 뭐, 7천여일을, 뭐, 그, 정복하고, 700여일을 정복하고, 이런 기사가 나옵니다. 뭐, 그리고 거기다가 준 성 이름이, 신성입니다. 신성. 그리고 남소성 있고, 신성. 그런데 이게, 이제 수명인 예대에 보면, 이 신성이, 그때 세운 신성. 지금도 신성은, 그, 중국 무순 지역에, 철이 많이 나는, 무순 지역, 이 지역에 남아있습니다. 이 신성에서, 이, 이, 가년 3가를, 데려오고, 다음에 남소성이라고, 쭉 있습니다. 남소성에, 가년 1가를, 데려왔다고, 구견 1가를 데려왔다고, 수명인 예대에, 써 있습니다. 이, 이 지역은, 구견이나, 이, 남, 뭐야, 죄송합니다. 이, 신성이 있던, 이 지역은, 그때 연나라가 뺏었지만, 연나라한테, 연나라가 어떻게 해서, 고구리어한테 다시 뺏겠다는 기록은, 삼국사기 안 나와요. 고구리어는 연나라에서 이겼다는 기록도, 아예 무시했으니까, 그, 그, 그, 비문에는 당연히 안 나오죠. 근데, 왜, 이, 중요하냐면, 이건 옛날에, 고구리어 부토였습니다. 고구리어, 구민이라고, 고구리어는, 이, 실내하냐라고, 새로운 것은, 조, 고구리어 북쪽의, 과거의 고조선 땅으로 있었던, 이 북쪽 부연아, 이 쪽 지역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고구리가, 그, 침략, 정복을 해서, 다시 정복을 했더라도, 이 사람들은 다 구민이라고, 표현합니다. 구민. 저는 이 표현이, 아주 상당히, 그, 행간에, 싶은 뜻이, 숨어있지 않느냐, 고구리어는, 이, 과거, 고조선, 네, 뭐, 거수국이었다. 고조선, 때부터 있었던 고구리어는, 그, 고토회복, 그 있었던, 고구리어가 가졌던, 고조선, 간만 아니라, 고구리어가 가졌던, 고토회복, 고구리를. 하나의, 국가적 어떤, 목표로도, 내세웠습니다. 이게 소위인데, 다물정신이라고 할까요. 다 물정신. 이, 여기서는 구민은, 그래서, 새롭게 그것을 전령하고, 데로운 사람도, 구민이라고 했었었어요. 왜냐, 이거는, 웬내라고 우리, 원래 고구리어 땅, 고구리어 땅이었던 사람들, 해서 살셨어 사람이다. 이렇게 하면서, 이 왕, 이, 고토회복을, 중시에서 구민이라는 표현을 썼지 않느냐 이렇게 저는 보조선의 거수국으로서의 고구려가 이미 존재했었다는 표현 하나의 근거도 구민이라는 표현에서 찾을 수 있지 않느냐 거기 보면 이건 조금 관계투 대항 비문과는 약간 나타나지 않는 사실입니다만 고구려 영양왕 11년의 기사를 보면 삼국사계 보면 영양왕 11년의 국초의 100원의 고구려 역사에서 유기가 있었는데 이것을 수정해서 요약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00원, 처음으로 문자로 기록됐다 국초에 국초라면 100원의 역사책이 있을 수 있을 정도면 고구려가 국초에 권국동으로 나서 역사책을 100원을 만들 정도 이미 고구려는 그 전에 쫙 내려왔다는 거죠 그래서 그 전 왕조 그러니까 고구려는 저는 주몽이 가려오면 PC37년에 실라보다 늦게 권국되었다 하더라도 그건 하나의 왕조 교체했다 고구려는 그 유민 그 부토를 회복하는 걸 다물정신을 끝까지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6위 100원에는 바로 고구려 전왕조 역사가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이걸 영양국 때 이문진이 신집 5권을 편창케하고 또 별도로 다른 사람을 식혀서 요약해서 수정했다 이렇게 기사가 나옵니다 국초의 100원의 역사서를 편창한 것은 고구려의 전왕조 거다 그리고 그 당시에 이제 문자가 없었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때문에 새롭게 문자로 그때 비록섭이 만들었다 이런 기록이 나오는 거서 우리는 눈여겨봐야지 않느냐 이래서 그 국민이란 표현 한번 저는 이걸 다시 한 번 더 연결해 보려고 합니다 왜 국민이란 표현을 다 썼는가 비례독신 이런 데서 데려온 사람들도 평양 가까운 데서 데려온 사람들 뭐 이런 사람들 뿐만 아니라 같이 쓰는 것이 저는 깊은 의미가 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실 이 능비 하나만 가지고도 일당천어 고구려의 문화적 광채를 발휘하고 있다 이렇게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만 저도 여기에 동의를 합니다 변론적으로 말씀드리는 시간이 굉장히 많이 났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저는 이 광개토대왕 그 비문의 일부를 보면 참 그 멋진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일부에서는 시조 추모왕 이후 이 이 유리왕때는 2도 여치로서 나라를 다 쓰렸고 3대 대주류왕 이후에 소승 기업으로서 나라를 발전시켰다 그렇게 하고 이어서 광개토왕 시대를 국부 민의 시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되는 의미가 심장하는 것입니다. 여기 지금 그 아마 펌플레스로 나눠드린 것은 국부민은자가 잘못됐습니다. 민자 여기 은자는 거기는 그 20은 짭니다만 잘못된 것입니다. 풍성한 은자입니다. 여기에는 바로 잡혀져 있습니다만 국부민은 유리왕 이후부터 이제 죄송합니다. 유리왕 이후부터 이제 2도 여치로서 나라를 다 쓰렸다. 추모왕을 이어가다 가지고 2도 흥치라고도 어느 정도 다 써도 무방합니다. 비문만 가지고는 판단을 못하니까. 훌륭한 토로서 나라를 이렇게 있고 그리고 3대 대주류왕은 소승 기업이라고 해서 나라의 지도인ium을 이어갔다. 광개토 대왕 시대는 국부민은 오곡 풍숙이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쫙 어떻게 하면서 나라는 부광하고 팩성은 평안했고 오곡은 해마다 흥량이 들어서 잘 읽었다.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만 국부민은이야 말로 오늘 우리 나라가 나가야 할 그런 국가 방향 목표로 삼아도 저는 손색이 없다 이렇게 합니다. 국부민은 하는 말은 저는 상당히 마음에 와 닿고 의미가 심장한 말입니다. 그 당시 고구리어 시대의 이 표현을 썼다는 게 저는 상당히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그런 표현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소위 중환 중심의 4대주의 사관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확립된 그런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흑기제도 바로 광개토 대왕은 비문에서 찾아야 한다 이렇게 봅니다. 광개토 대왕 비문에는 어떻게 됩니까? 천재 지자 추모왕을 천재 지자 황천 지자라고 그랬어요. 천재 지자 황천 이건 바로 하늘의 아들 황재다이마다 이런 표현을 아주 천머리에 이렇게 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또한 비문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주변 국민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고 표현하고 있지 않아요? 백재, 신라, 동부여 이런 데부터 조공을 받았다. 조공이라는 것은 중국 황재만 있을 수 있는 표현이거든요. 그런데 광개토 대왕 그 때 당시의 조공을 받았다. 이렇게 조공이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중국과 대등한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후대로 오면서 회사에게 돼서 완전히 사대주의사관으로 전락이 되고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펜쳐날 그 무렵에는 결국 완전히 중국 위주의 중원 중심의 역사체. 김부식은 삼국사기 기록 중에 중국 관련 역사체 3분의 1을 뵙겠다고 합니다. 3분의 절반 정도는 그대로 일치하는 걸로 그렇기 때문에 그걸 극복하게 해서는 광개토 대왕의 이 비문을 우리는 새겨 가지고 떴떠시 연구를 해야 한다. 그 다음에 영락 13년 기사에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외국 괴폐. 그 앞에 기사에도 나옵니다만 외국 괴폐 외굴을 괴멸에 가까울 정도로 패배시켰다. 다시는 넘모지보다 했구만. 일본에 대해서 일본이 들으면 선을 할 거예요.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로부터 이런 자부심 있는 광개토 대왕의 비문 을 가지고 우리가 접근을 하면 더 연구를 할 때 떴떠다지 않느냐 그리고 신이 나고 또 새롭게 우리 역사를 써야 한다는 이런 심이 쏟는다 이렇게 보면서 저는 광개토 대왕 비문에 입각한 고대사 또 우리 역사를 보는 시각을 바꿔야 하고 이 비문을 이제는 가장 역사서의 기본서로서 기본 텍스스로서 사마야 한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비문 과 일치하지 않는 다른 역사서는 그걸 보완하는 의미로 봐야지 지금 은 비문에는 이렇게 했다고 마지막에 설명하다가 광개토 대왕 비문도 이런 표현이 나온다. 우리 역사 관련 서적들 기술하고 있어요. 우리 민족이 1600년에 직접 우리 손으로 쓴 그 역사서를 놔 두고 그 뒤에 한 700년 800년 이런 후에 써진 중국 민족의 그 어떤 국회 국든비 충축불배에서 써진 이걸 금과국지로 여기면서 하는 그런 역사 기록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말씀이 상당히 주서가 좀 없고 또 제가 주장하는 내용이 상당히 또 파격적인 내용도 있을 수 있습니다만 저는 그만큼 고민도 했고 또 거기 에 대해서 하나하나 일을 제기하면 제 나름대로 연구했던 거 또 제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자료는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 제 얘기를 끝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