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회 독립운동 과정에서 추진된 통일운동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1-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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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
안녕하십니까. 오늘 제 85차 우당 역사문화강좌에서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저는 독립기념관 관장을 맡고 있는 한시준입니다. 오늘 제가 드릴 말씀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추진된 콩일운동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게 직접 대면하고 하는 것이 아니어서 제대로 의사가 전달되고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급적 쉽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독립운동 할 때 아주 중요하게 다른 독립군을 조직한다든지 단체를 조직한다든지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우리 민족이 독립 운동할 때 해결해야 될 과제가 있었습니다. 그 과제라고 하는 것은 사라지다시피 독립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목표가 있잖아요. 독립운동의 목표는 일제한테 빼앗긴 국토를 다시 되찾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통 1차 목표라고 그러죠. 그다음에 되찾은 후에는 우리 민족끼리 살 수 있는 독립국가를 건설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 제일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독립운동의 과제인데 그게 민족을 하나로 대단히 지키는 문제입니다. 독립운동 할 수 있는 독립운동 역량을 한 곳으로 모으는 일이죠. 독립운동 과정에서 민족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슴 이런 정치 사상이 되돌됐잖아요. 그러니까 정치적인 사상, 인형을 달려하는 이 세력들을 통일하고 통합하는 이 문제가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이제 우리 민족의 대단율이 중요한 과제를 데려 된 것은 우리 민족 구성원들이 세계 각지로 흩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제의 침략을 받고 나라를 빼앗기면서 국내 있던 국민들이 세계 각지로 이줄했습니다. 그래서 만주의 서간도, 국간도 지역으로 몇십만에 달하는 한인들이 이줄했고 연예주 지역에도 무슨 블라디볼스터, 우스니스크, 하바로브 스쿨 이런 지역까지 우리 한인들이 이줄했습니다. 중국 대륙 각지에도 청진, 국경, 상해남경 이런 각지역에도 하는 사람들이 가있습니다. 심지어는 미국에도 1903년서부터 많은 한인들이 미국으로 노동 의미를 갖죠. 사람들이 하와이에, 또 미국 본토에, 또는 멕시코에 심지어는 쿠바에까지 가 있었습니다. 우리민족들이 세계 각지로 흩어져 있죠. 그래서 어떻게 각지로 흩어져 있는 이 우리 민족을 하나로 대단결 시키느냐 이것이 독립운동의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이제 그런 과제를 제일 처음 해결하고자 안을 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1917년 7월에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규식, 박은식, 신체호 조소왕, 이런 14명이 대동단결 선언이라고 하는 것을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우리 민족들을 어떻게 대동단결 시킬 수 있을 것이냐 그 방안을 지시한 것이었습니다. 그 대동단결 선언에서 실수했던 방안은 우선 우리 민족의 유일 유일 무의한 기구를 세우자. 유일 무의한 기구라고 하는 것은 대표기구죠. 그래서 그 민족의 대표기구를 어디든지, 연애주든지, 반주든지 어디 대표기구를 하나 세워놓고, 전 세계 각지에 있는 사람들이 대표기구의 명령의 목적을 하고, 또 대표기구의 무슨 시금을 납부하고, 이러면 몸은 각지도 훑어져 있지만 우리 민족의 역량은 한 곳으로 집결시켰습니다. 그게 바로 대동단결 선언의 유지였습니다. 그래서 이 대동단결 선언이 우리 민족의 대표기구를 수립하자라고 제창하옷이라고 해서 학교에서는 이 대동단결 선언을 임시정부 수입을 제창했던 그런 선언이다. 그렇게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대동단결 선언이 세계 각지로, 만주, 미주, 연애주 각지 로 보내졌는데 그 지역에서 여기에서 도미한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대동단결 선언은 실제로 이렇게 민족을 대동단결 시키는, 이런 데까지는 이래서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민족이 대단결을 실현을 했습니다. 바로 그 계기는 우리가 잘하는 성국의 19년 3월 1일날 일어났던 3일 운동이었습니다. 3일 운동은 잘하다 싶이 우리가 독립국이라고 한 것을 선언하고, 또 그 독립국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선언을 전체가 세울들 들어서 대한동립만세를 이치는 만세 쉬운동을 전기했습니다. 그 만세 쉬운동을 국내는 물론이고 소간도, 북한도, 연애주, 심지어 은 미국에서도 그런 쉬운동이 일어났죠. 그게 바로 이런 쉬운동을 통해서 우리 민족이 하나로 대단결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대단결을 이룰 것던 그 상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였습니다. 그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3월 1일 날 독립 선언의 제일 첫 머리가 5등은 자의 아 조선의 독립국인과 조선인의 자주민 임을 선언하는다. 라고 하는 것이죠. 3일 독립선언의 핵심은 바로요 청문장에 있습니다. 청문장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 민족은 일제에게 심민지 지배를 당하고 있지만 우리 민족 늦을 인정하지 않는다. 알아봐는 것이 안 하고 또 두 번째는 우리는 독립국이다. 알아봐는 것을 얘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독립국을 선언하고 실제로 40일 만에 중국 상해에서 그 독립국으로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나라를 권립을 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국가를 유지운 음악위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했습니다. 바로 3일 운동을 통해서 우리 민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수립하고 그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민족의 대단둘이 이루어진 것이죠. 지금 보시는 사진은 1921년 1월달에 새해를 맞아서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모여서 찍은 사진입니다. 여기 보시면 제일 가운데 이슨만 대통령이 있죠. 이슨만 대통령 또 저산한청 후 이분들은 미주 지역에서 더하던 분들입니다. 또 국무총리 이동위 또 팩장 뛰고 계신 분 이분은 연예주에 계신 분 이죠. 또 무슨 이시영 조소왕 이런 분들은 난주에서 활동했던 분들입니다. 또 거기 무슨 현순, 치창식, 신이키 이런 분들은 국내에서 활동 하던 분들이죠. 그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던 분들이 하나로 모여서 단결한 것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였습니다. 또 정치적으로도 국무총리였던 이동위는 연예주에서 1918년에 사회주의를 인용으로 했던 한인 사회당을 조직했던 분들이죠. 또한 이 지역도 인용도 달랐던 분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하는 것으로 대단결을 이루었습니다. 그 이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실을 때는 이후에 다시 통일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통일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경위가 있는데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족 대단결하는 그런 성증으로 수입됐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시일을 가면서 그 기능, 그 역할을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단이었던 대통령 이슬만 박사가 미국에 계셨죠. 실제로 미국에 있으면서 상혜로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대통령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상해에 있는 국무위원들과 미국에 있는 대통령 기간에 갈등이 생기고 국회등이 상당히 심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1925년에 대통령을 투맥하는 그런 일이 벌어졌죠. 바로 그런 문제도 인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족 대단결 그 기능, 그 역할을 제대로 간다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거기에 독립운동 방략, 독립운동을 어떻게 할 것이냐 라고 하는 문제도 의견이 달랐습니다. 어떤 분들은 독립군을 조직해서 일제와 독립전정을 하자 라고 하는 세력들이 있었고 그것은 일제를 상대로 해서 우리가 이기고 시 불가능하니까 세계 열광들에게 우리의 독립울류에서 대교 활동을 벌이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 의견이 다르죠. 또 거기에 지역적인 갈등도 있었습니다. 무슨 기오파, 소오파 그런 갈등도 있었고 정치적인 사상 인연의 사회도 있었습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민족주의계열 또 사회주의계열 또 아낙이쯤 이런 게 들어오면서 정치적인 인연에 따라서 정치적인 목표. 그래서 우리가 독립된 위에 어떤 국가를 건설해야 될 것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서로 달랐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런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담결됐던 것이 다시 흐터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걸 다시 모으고자 통일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 과정에서 실제로 통일운동이 출인됐다는 것이 다섯 차례 있었습니다. 그래서 1923년에 국민 대표회의라고 하는 것이 1차였고 또 20년대 후반에 민족위일당조직운동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통일운동이 전개됐습니다. 그리고 30년대 전방위에는 5개 정당이 통일운동이라고 하는 통일운동 이 있었고 30년대 후반에는 7개 정당이 통일하자고 하는 통일운동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부분적인 송파도 있었지만 대치로 결렬 됐습니다. 그런데 1940년대에 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전개됐던 통일운동에 대해서 간단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첫 번째 통일운동은 1923년 상하위에서 있었던 국민 대표회의 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국민 대표회의가 수립된 것은 임시정부가 민족 대단결체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임시정부 내부에서도 그렇고 일부에서도 그렇고 이제 우리가 세계 각지의 우리 독립운동 세력들이 하나로 통일을 이루어야 된다 그런 논의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런 논의를 제일 처음 한 것은 국정에서 활동하고 있던 박용만 박은식 이런 분들이 군사 단체들을 담아서 군사 통일이라고 하는 걸 했습니다. 거기에서 이제 우리 대한민국 유정부가 수립했지만 국기능과 역할을 못하니까 다른 다른 방법으로 통일을 이루자 라고 하는 것을 제안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국내 각지에서 활동했던 공립운동 단체 그 대표가 큰 자리에 모여서 해에 일 같자 라고 하는 것을 주장 하랬습니다. 또 임시정부 내부에서도 도산안창호 선생을 중심으로 해서 국민 대표 회의를 서집하자고 하는 그런 의미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1923년 1월 달부터 국내 각지에서 140여 개 단체 대표팀을 모였습니다. 거기에는 국내, 중국, 안주, 연애주 심지어는 미국에서 활동한 미국에 있던 도립운동 단체 대표팀을 참여했습니다. 이것은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독립신문인데 독립신문에 보면 축 국민 대표회의 개혜 라고 하는 곳이 있죠. 그래서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 대표팀이 모여서 국민 대표회의를 개최를 해서 여기서 우리 민족의 통일을 이룰 수 있는 방안을 하자. 상당히 큰 기대가 있었습니다. 국민 대표회의는 23년 1월 부터 6월까지 한 6개월 동안 지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핵심적으로 문제가 대륙된 것은 대한민국 의미시정부를 어떻게 할 것이냐 라고 하는 문제가 핵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대한민국 의미시정부의 조직과 기능이 잘못되어 있으니까 그것을 고쳐서 개조해 가지고 대한민국 의미시정부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고 독립운동을 정기하자. 그렇게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죠. 보통 그분들을 개조파 그렇게 부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임시정부가 지기능 역할을 하지 못하니까 임시정부를 아주에 없앱 버리고 새로운 조직체를 교성하자 안 하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분들을 창조파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두 주장이 서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몇 걸 동안 평회선으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창조파 수요끼리 여기서 탈퇴를 해서 연예주로 가서 연예주에서 조선공화국이라고 한 것을 선파렸습니다. 그래서 이 국민 대표의 일을 통해서 통일을 이루고 했던 이러한 시도는 결렬 됐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로 통일운동이 일어나는데 통일운동에 그런 주된 것은 민족 유일당을 조직하자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당을 조직하자 그런 운동이었습니다. 이제 이 운동 일어난 것은 아까 말씀드렸던 이슨만 대통령 문제로 해서 임시정부가 파행을 띄었다가 1925나 3월에 이슨만 대통령을 타냈습니다. 물론 지금도 대통령 타냈다는 것은 엄청 큰 문제죠. 그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대통령 타냈을 둘러싸고 한 5년 이상 끌다가 대통령이 타냈다면서 임시정부는 완전히 파탄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시 수습할 수 있는 방안으로 민족 유일당을 조직하자 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제안했던 분은 실제로 임시정부를 수립총일서부터 조직하고 운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토사한 안창호 선생님이 민족 유일당을 조직하자고 제안을 냈습니다. 또 그것을 당시 대통령을 타냈다고 하고 나서 한종 수방을 국무령이라고 바꿨는데 그 국무령이 취임했던 홍진 선생도 민족 유일당을 조직하자 라고 해서 그 운영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이 운동은 1926년부터 시작돼서 29년 말까지 3, 4년 동안 전 독립 운동 전선에서 출입이 됐습니다. 우선 중국 관내 중국 대륙 지역에서 국견이나 상해나 남련이나 그다음에 한국 이런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우선 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해서 각 지역에서 유일당을 촉성해라고 하는 걸 조직했습니다. 그래서 그 촉성해를 합치면 유일당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운동이 전개됐는데 결국 청구 29년 말에 봉산주의 겨울에서 유일당 운동에서 탈퇴를 했습니다. 탈퇴에서 봉산주의 세력들은 별도로 상해에서 유호 한국 독립운동자 동맹, 호라고 하는 것은 상해를 읽컵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유일당 운동이 분열됐죠. 유일당 운동이 결렬이 됐습니다. 이런 것 와서 봉산주의 세력이 탈퇴하고 나서 대한민국 음식 전문을 중심으로 했던 이동령, 이시영, 진구, 안창호 이런 분들이 한국 독립당을 조직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유일당 운동을 교성하지 못했지만 이런 당들이 교성되는 것이죠. 완주 지역에서도 민족립당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완주 지역은 서부간도를 합치는 지역인데 여기는 크게 참이고 정의부, 신민부, 이 시부소가 완주 지역을 주나라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완주 지역에서는 이 실부를 하나로 통일하자 라고 하는 방법 으로 유일당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게 우리가 아는 산부통합운동이죠. 산부통합운동이 산미부, 정의부, 신문 대표님이 참여했는데 거기에서 통합의 방법을 둘러싸고. 그 일태면 산부를 완전히 해체하고 하나의 단체를 만들 것이냐 아니면 산부가 연합한 형태로 만들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운경이 틀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산부를 연합해서 통일을 이루자 라고 하는 세력들이 중심으로 해서 세부를 통합해서 국민부라고 하는 것을 창립을 했습니다. 그리고 국민부의 행정부서죠. 그리고 국민부의 전의조지처럼 조선, 청룡당이라고 하는 것을 결승을 했습니다. 그때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운 유일당을 조직하자라고 했던 분들은 국만주 쪽으로 가서 거기서 한국 국민부당이라고 하는 것을 바로 결승을 했습니다. 그래서 완주 지역에서도 유일당을 결승하는 운동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유일당 운동이 유일하게 성공한 것은 국내에였습니다. 국내에서도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어서 1927년 2월에 민족주의계열 또 민족주의 조합화계열 거기에 의사의주의계열이 합쳐서 신간해에 하라고 하는 단체를 결승했습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는 이 과정에서 성공한 예는 국내에 신간해 결승이었습니다. 유일당 운동이 신간해 결승으로 해서 19월에 성공한 것이죠. 하지만 완전하게 전 민족이 개동당결한 민족의 유일한 이런 정당한 교수와 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1930년대에 와서 5개의 정당이 통일하기 위한 통일 운동이 또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제 통일 운동이 일어나게 되긴 배경은 20년대 후반에 민족 유일당 을 결성하자 하는 운동은 결렬되고 말았지만 그 여파로 인해서 세계 각지에서 파는 정당들이 결승이 됐습니다. 그래서 오늘 4차례를 보면 빚만주 지역에서는 한국 국립당이 결승 이 됐습니다. 그걸 주도했던 분은 홍진, 인간사라는 지청 전장분, 이분들이 중심 이래서 한 공립당을 결승했고 서간도주역에서는 조선혁명당이라고 하는 정당을 결승됐습니다. 남경에서는 한국혁명당이라고 하는 것이 결승이 됐습니다. 그것을 주도했던 분이 해공신피 선생인데 한국혁명당은 보통 백적 주위, 백은 민족주위, 적은 공산주위, 흙은 무전구주위죠. 이 세세인사들이 합쳐서 만든 것이 한국혁명당이었습니다. 또 이제 남경에서 다시 신한동립당이라고 하는 것이 결승이 됐는데 신한동립당은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한국동립당이 일본이 왜 1931년 에 만주를 심장해서 만주를 점정하잖아요. 호주 활동할 수 없으니까 중국 관계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만주에서 내려온 한국동립당 또 남경에서 활동하고 있던 해공 선생이 주도했던 한국혁명당이 두 방이 합당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한동립당이라고 하는 것이 만들어지고 또 아까 말씀드렸던 유일당 운동이 결렬되고 나서 임시종도 인사들이 한국동립당이라고 하는 것을 결승했습니다. 또 이제 당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것이 대한동립당인데 김위식 박사가 주도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주로 미준 세력들이 주도했던, 미준 세력 후원했던 이런 정당이었습니다. 이제 이 이에 주의한 세력으로 우열단이 있었습니다. 우열단은 잘하시지만 청구 대 19년 말에 김원동을 중심으로 해서 우열투쟁을 정지하기 위해서 줬었던 그런 단체죠. 여기는 주로 청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1930년대 전반기에는 이 독립운동 전선의 많은 정당들이 교성돼서 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정당들을 하나로 통일하자 라고 하는 운동이 일어난 것이죠. 그래서 그것이 다섯 땅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다고 해서 우당 통일 운동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 통일 운동이 일어나게 됐던 계기는 1931년 9월에 일본이 만주로 침략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바로 그걸 계기로 해서 일본이 만주로 침략했는데 우리 독립 운동도 일본과 항전할 수 있는 대일전선을 하나로 통일시켜야 됐다 라고 하는 취지였습니다. 그래서 만주 사변이 일어난 후에 1932년 상회에서 여러 정당들 대표가 모여서 한국 대일전선 통일 동맹이라고 하는 그런 연합치를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각 당 대표 둘로 구성된 것인지 각 당 대표 분들이 참여해서 이제 우리가 일본과 싸우는 대일전선을 하나로 통일해야 됐는데 그러면 다섯 개 종당을 하나 더 통일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런 취지로 출발을 했지만 바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1932년 4월에 윤봉기 회사가 상회에서 일본 부스는 애들을 처단하는 의무를 일으킨 후에 일본 경찰이 임시종 부여인들을 체포하고 하려니까 임시종 부여인들을 또 독립운동했던 분들이 상회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항주, 가흥, 진강, 당정 이런 식으로 다 평산이 됐죠. 그래서 이 사람한테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다가 이제 한 2, 3년 흘러서 남경에서 그 다섯 개 종당들이 모여서 통일하는 모임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소위 오당 통일의 일을 넣은 것이죠. 거기에 핵심은 다섯 개 종당을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운 당일당을 만들자 라고 하는 것이 오당 통운동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일당을 만드는 통일해서 당일당을 만드는 전제로 그 전에 있던 임시종부는 어떻게 할 것이냐. 임시종부는 피지하자 라고 하는 것이 전제였습니다. 그런데 임시종부에서 특히 한국 임시종부는 웅호이중하는 것이 한국동인당이잖아요. 그래서 한국동인당에 특히 그런 이동농, 이시영, 김구 이런 분들은 임시종부는 해체할 수가 없다. 그래서 거기에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은 오당 통일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다섯 개 종당들은 다 통일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1935년 7월에 그 다섯 개 종당이 완전히 종당을 해체하고 하나로 통일 된 조직체를 결정했습니다. 그 이름이 민족 통일운동 당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쨌든지 일부 임시종부를 웅호이중하는 인사들이 참가하지 않았지만 다섯 개 종당이 완전히 해체하고 하나의 통일을 이룼던 것이 민족 혁명당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통 의미를 통일전소를 이룬 통일전소를 종당이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말씀드리는데 또 뭐 종당일이, 단체리 종당일이 많고 해서 좀 혼란스러우시죠?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많은 당들이 만들어지고 해서 그래서 사실은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복잡하지만 그래서 제가 하루종 이야기 쉬우시도록 그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민족 혁명당으로 통일을 이룬었지만 그것이 와야가 됐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제 제 4차 통일운동 일어나고 그때는 7개 종당이 통일하자고 하는 친당 통일운동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통일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계기는 민족 혁명당이 통일전선 종당으로 결성이 됐지만 얼마 안 가서 해체가 됐습니다. 그래서 35년 7월에 민족 혁명당이 결성이 됐는데 2달 후에 35년 9월에 거기에 참여했던 조소왕 홍진, 이룬인들이 탈당을 했습니다. 탈당했던 이유는 우리가 민족 혁명당에 참가해 보니 민족 혁명당이 공산주의 세력들이 맞고 방향이 공산주의 쪽으로 간다. 그래서 홍진, 조소왕 이룬인들이 탈당을 해서 한국동립당을 제공했습니다. 그 한국동립당이라고 하는 것은 1930년에 임시정부 이룬인들이 만들었던 종당이죠. 그게 민족 혁명당에 참여해서 해체가 됐었는데 이 조소왕 홍진 이분들이 탈당을 해서 한국동립당을 제공했습니다. 그래서 민족 혁명당이 분열된 것이죠. 또 이제 35년 11월에 달리면 민족 천면장에 참여하지 않았던 임시정부를 폐지할 수 있다. 아랍에서 참여하지 않았던 이동영, 이시영, 김구, 송명조, 차리석 이런 분들이 한국국민땅을 결성했습니다. 그래서 한국국민땅을 결성해서 이제 우리 한국국민땅을 중심으로 해서 임시정부를 유지오고시켜가자. 그래서 한국국민땅이 탄생이 됐습니다. 그다음에 37년에는 민족 혁명당에 참여했던 만주 지역에서 활동했던 제이력들 이슬리들이 보통 조선 혁명당인데 그 제이력들이 탈당을 했습니다. 또 우리가 아는 이청천 장군, 유동열 장군, 최동우 이런 분들이 다 만주에서 활동했던 분들이잖아요. 이분들이 민족 혁명당에 참여해서 민족 혁명당에서 각각을 임, 민족 혁명당은 김원봉이 주도하고 자기에게 할 수 있는 역할이 없고 정치적인 인형으로도 맞지 않죠. 그래서 이분들이 탈당을 해서 이에 서간도에서 결성됐던 조선 혁명당이라고 한 이름으로 다시 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민족 혁명당이 이제 다 통일 전선 최에서 다시 분열이 된 것이죠. 이제 그 이에 독립운동 전선에서 조선 민족 해방운동이라고 하는 단체가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은 김성숙이라고 하는 분이 주도미도에서 만든 단체고 조선 청년 전위 동맹이라고 하는 단체도 만들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여기도 치창익의 부인이었던 허종숙, 이분들이 결성하는 곳인데 치창익이나 허종숙은 국내에서 조선 공산당을 결성해서 활동했던 분들이죠. 또 공산주의 단체였습니다. 또 여기에 이제 아나키즘을 기반으로 해서 활동하던 세력들이 조선 청명자 연맹이라고 하는 것을 유자명선생이 주도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민족 혁명당을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었다가 다시 민족 공인당이 와야 되고 공산주의 아나키즈트 이런 세력들이 여러 정당 단체들을 만들어서 다시 공인 운동 전선에는 여러 정당 단체들이 생겨나게 됐습니다. 그것이 대략 7개가 됩니다. 그래서 7개의 정당 단체가 통일하자고 하는 그런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죠. 이제 그 통일 운동이 일어나게 됐던 직접적인 계기는 중일전쟁이었습니다. 1937년 7월 7일 날 일본군이 국경교회의 노국회라고 하는 데서 중국 군들을 공격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때 중국군이 전면적으로 일본하고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중일전쟁이 일어났죠. 그 중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동립운동 세력들은 이제 그 중일전쟁이 우리 한국의 동립을 생취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계기가 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 좋은 계기가 우리가 7개의 세력으로 남여져 있는데 그 세력을 하나로 통일시켜야 되겠다. 그러니까 동립운동 영향을 하는 것은 결정시키는 게 필요하다. 안 하고 하는 그런 분위기였죠. 그래서 다시 통일운동이 일어나게 됐습니다. 그때 통일운동이 일어났을 때 먼저 우익진영은 우익진영대로 좌익진영은 좌익진영대로 먼저 연합체를 결정했습니다. 이제 연합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조직을 가지고서 하나로 합치는 것이죠. 우익진영의 한국국민당, 한국북립당, 조선팀 명당 또 여기에 미주 지역에 한인, 미주 지역의 단체들이 있죠. 이 단체들 6개가 거기에 도입을 했습니다. 그래서 9개 정당 단체가 모여서 한국 광보운동 단체 연합회 라고 하는 조직을 결정했습니다. 37년 9월에 남중에서의 결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약층에서 광복진선 그렇죠. 그저 광복진선이라고 하는 것은 우익진영의 3개 정당이 중심이 되고 미주 지역의 6개 단체가 참여했던 그런 연합체였습니다. 좌익진영도, 좌익진영도 연합체를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11월에 민족혁명당 또 조선민족 해방 동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 청년전이 동맹 그 4개 단체들이 연합해서 연합체 명칭을 조선 민족 전선연맹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래서 이제 연합책이 되지만 중일전정을 개기로 해서 좌익진영이 서로 연합체 양대 진영을 청소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연합한 수의 그 7개 정당을 하나로 통시키기 위한 운동이 일어났지만 그것도 제 교부 시댕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해서 일본 군의 전문지가 확대됐잖아요. 그래서 확대되면서 임시정부를 비롯해서 독립운동시력들이 일본군 전문지역을 피해서 피난을 다녔습니다. 피난을 다녀라고 통일회의를 할 수가 없었죠. 그다그 통일회의가 송사가 되는 것은 1939년 8월에 중국 사천성 기강이라고 하는 곳에 와서 그렇습니다. 이제 일본군의 전문지역을 피해서 피난을 다녔던 독립운동시력들이 대체로 1939년 5월이면 그 사천성 기강에 도착합니다. 그 기강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지수도로 쓰고 있던 충청, 거기에서 바로 그 남쪽으로 한 100mm 정도 떨어지는 조그만 도시입니다. 거기는 전란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것이죠. 그래서 오랜 기간 동안 피난단에다가 기강에 정착하면서 뒤로서 안정을 찾게 됐습니다. 그때 거기서 칠단들이 서로 통일을 이루자고 하는 통일회의를 개최했습니다. 그 통일회의는 먼저 우익진영, 좌회진영을 우익진영이는 대표가 백범 김두구 또 좌회진영은 약산 김원봉이죠. 그래서 이 두 분이 만나서 우리 좌우로 연합했던 이 7개 정당을 하나로 통일시키자 라고 하는데 합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합의를 해서 동지,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신이라고 하는 것으로 발표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어떠한 방법으로 통일을 주자, 라고 하는 부분은 원칙까지 그걸 다 제시가 되어 있었죠. 그래서 그 합의에 의해서 39년 8월달의 기강에서 슬픈 대표들이 모여서 통일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때 우익진영에서는 한국국민당, 한국국립당, 조선욕명당, 위시랑이 또 좌익진영에서는 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북맨, 조선혁명자연맨, 조선청련전의동맹. 그래서 이 계단체가 모여서 통일회의를 했습니다. 그 통일회의의 핵심은 우리 7개 정당 단체를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운 단일당을 만들자, 라고 하는 것이 통일운동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견이 나타나게 된 것은 그럼 만일 7개 정당이 완전히 해체하고 단일당을 결성했을 때 그 동일운동은 누가 출도할 것이냐, 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익진영에서는 우익진영은 대한민국임수정부를 공호, 유지하고 된 세력도 있죠. 그리고 우익진영에서는 독립운동은 대한민국임수정부가 주도해야 됩니다. 아라고 하는 주장이고 또 좌익진영에서는 실당을 해체하고 사로이 결성된 단일당의 통일운동을 주도해야 됩니다. 아라고 하는 것으로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어디에 둘 것이냐, 아라고 하는 것까지도 이견이 났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이견이 접혀지지 못하고 좌익진영이 탈퇴을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칠당통일의의도 결렬이 되고만 알았습니다. 그 칠당통일의의에 대해서는 아주 그 구체적이고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건 중국 쪽에서 작성하는 것인데 이제 제목을 보시면 이게 기강 한국 칠당통일의의 경과 보고서 아라고 하는 것인데 요건 중국 쪽에서 한국 사람들이 칠당통일의의하는 것에 대해서 상세하게 조사해서 그 보고서를 남기고 싶습니다. 거기에 헤이 대표는 누가 참여하고 각 정당의 통일에 대한 이견은 어떻고 또 그것이 왜 결렬이 됐는지 라고 하는 상세한 그런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제 네 차례에 걸친 통일운동이 물론 부분적으로 소c가를 거뒀지만 대출의 완전한 통일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완전한 통일을 이룬 것은 1940년대 충청에서 했습니다. 중경에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시력들이 완전히 하나로 통일을 이루게 됐습니다. 그 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일을 이루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때 40년대에 일어났던 그 통일운동을 제5차 통일운동이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는데 그때 통일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 계기는 1942년 12월 8일 날 미국과 일본 간에 전쟁이 일어났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본이 미국의 해군기지가 있던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공격을 받은 미국이 이제 일본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하고 일본과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미국과 일본 간에 전쟁이 일어났죠. 그 미일간의 전쟁이 택평양 상에서 주로 이루어져 가지고 흔히 택평양전쟁 그렇게 해도 부릅니다. 그런데 이 미일간의 전쟁은 한국의 독립운동자들한테 엄청나게 좋은 기회를 이루게 됐습니다. 우리가 독립을 증치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다, 저런 기회다 라고 생각을 하고 그래서 이 미일전쟁 발발했을 때 그 좋은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용량을 한국수를 집결시켜야겠다 라고 하는 그런 논리가 일어났습니다. 그때 문제가 그럼 민족의 용량을 어디로 집결시켜야 됐냐 라고 하는 문제였는데 그걸 가장 먼저 제기한 것이 조선 민족 해방 동맹 또 김석수 선생님의 입근은 거기였습니다. 그래서 조선 민족 해방 동맹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웅호 선언 이라고 하는 것을 받들였습니다. 거기 핵심적인 요지는 이제 미일전쟁이 발발해서 우리도 공립전쟁에 참여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용량을 한국을 수익을 집결시켜야 되는지 집결시킬 수 있는 곳은 어디냐 그 집결시킬 수 있는 곳은 정당보다는 그래도 정부가 정부가 권익가 있지 않냐 그래서 용량을 결집시킬 수 있는 곳은 대한민국의 유치성부다 아라고 하면서 조선 민족 해방 동맹은 임시정부에 참여할 거다 라고 하는 것을 먼저 선언했습니다. 또 이제 좌회진영을 주도하고 있던 민족혁명당 그건 약산 김용봉 선생님이 입근은 민족혁명당이죠. 민족혁명당에서도 미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우리를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하는 것을 교정하고 위해서 당 대표 대회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 대표 대회에서 우리 민족혁명단도 임시정부를 참여해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 용량을 결집하자 라고 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40년대 미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이 좌회진영에서 우리가 임시정부를 참여하겠다 라고 하는 뜻을 밝히고 그 좌회진영이 임시정부를 참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임시정부를 참여하는 과정이 그 과정이 있습니다. 그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임시정부라고 하는 것이 임시정부는 행정부잖아요. 임시정부는 당정부 그래서 당에 해당되는 것은 임시의정원 임시정원이라고 하는 것이 국회지 않습니까 그래서 임시정부의 국회라고 하는 것이 있고 또 정부는 임시정부 행정부가 있고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로 한국광복군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임시정부가 크게 당정부 이라고 하는 조직체로 가지고 있는데 그 좌회진영이 어디에 참여할 것이냐. 그래서 가장 먼저 참여한 것은 임시의정원 국회로 먼저 참여를 했습니다. 그래서 1942년 10월달에 임시의정원 제34차 정기 의회가 열렸습니다. 그 임시의정원도 국회고 내년도 임시의회 정기 의회를 하죠. 정기 의회는 10월달에 했습니다. 그래서 42년 10월달에 34차 정기 의회가 열릴 때 좌회진영 의원들이 그 위에 참여하는 것이죠. 그동안 임시의정원은 한국동립당 한국국민당 그러니까 한당 임시정부로 온무하는 그러니까 한당이 임시의정원을 조직하고 운영했습니다. 저희 일당체지로 운영이 됐던 것이죠. 거기에 이제 좌회진영의 민족혁명당 조선민족 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맨 이런 인사들이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이 돼서 의회에 참여를 했습니다. 그리고 좌회진영 의사들도 참여를 의정원 의원으로 참여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34차 의회가 좌우 세력들이 통일을 이룬 통일 의회가 됐습니다. 그래서 의의로 먼저 통일을 이룬 것이죠. 잠깐 빛나가는 얘기이지만 이 42년도에 임시의정원으로 통일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우리 한국정치사, 특히 정당사회에서 논란 변합니다. 그동안 임시의정원, 그 국회가 그 이전까지는 일당체지로 운영이 돼 왔습니다. 그런데 좌회진영의 민족혁명당 조선 민족 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맨 이게 참여하면서 일당체제에서 가당체조를 변한 것이죠. 또 좌회진영의 정당들이 참여하면서 여당과 야당이 생겨났습니다. 여당은 지금까지 임시정부를 요구 유지해왔던 한국공직당의 여당 역할을 하는 것이고 좌회진영의 민족혁명당 조선 민족 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맨 이런 정당 단체들은 야당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소위 정당사회에서 특히 임시의정원, 국회로 운영하면서 여당과 야당이 생겨났고 또 그런 체대로 운영이 되겠다. 이것은 우리나라 의해 발전사에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 여당과 야당이 서로 지금도 국회에서 여당, 야당이 서로 대립하고 하잖아요. 당시 의정은 운영도 지금 국회못지 않게 여야의 대립 활동 상당히 대단했습니다. 지금 보시는 사진은 34차 임시의정원힘 좌우가 통일해서 개차하는 회의죠. 그래서 그 34차 의정원 의원들이 참여해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거기에 보면 가운데 백범 김무선생 임시현모 주석이고 그 옆에 있는 홍진이라고 하는 분은 임시의정원 의자인 것 그렇죠. 맨 오른쪽에 다 보일 수는 모르겠는데 맨 오른쪽에는 김웅목, 민족혁명당의 총성 있죠. 이 분이 계시고. 여기 여기 보면 김성숙 이 분은 조선 민족 해방 동맹의 주도자시고 여기 유잘명 선생님 여승 조선 훈련자, 연맹, 아나키스트 그런 분들이 다 함께 참여하셨습니다. 그래서 의정원으로 통일을 이루었던 이 모습입니다. 다음으로는 무장 세력이 좌익진의 무장 세력이 광복으로 편입하면서 조선이 군사적으로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잘하시지만 좌익진영에서는 1938년 10월 달에 그 한콕을 하는 곳에서 조선 의용대라고 하는 무장조직을 겹승했습니다. 광복군보다 2년 앞서서 좌익진영인 무장조직을 겹승했죠. 그 조선 의용대는 대체로 많은 청년들을 기반으로 해서 겹승이 되어 있고 조선 의용대가 중국전선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경력을 모집하고 해가지고 많을 때는 경력이 330명 정도가 됐습니다. 그 다음에 1941년 3월 달, 5월 달에 그 대원들 상장수가 황화를 건너가지고 태양산지용으로 이동을 했죠. 화복지용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조선 의용대는 중국 관내에서 한국인들이 제일 처음으로 조직했던 무장조직이었습니다. 그 무장조직이 1942년 7월 달에 광복군로 편의했습니다. 이제 광복군로 군사 통일을 이룬 것이죠. 그때 이제 조선 의용대 개편 선언이라고 하는 것으로 발표하고 우리 지금까지 조선 지금까지 유지해왔던 조선 의용대는 해체하고 광복군로 편의파다. 그래서 우리 조선 의용대는 어떻게 할 것이냐. 우리는 정성 단결해서 우리의 민정 용량을 광복군로 집결해가지고 우리가 독립전쟁을 수행하는데 우리가 조석이 되자. 이제 그랬습니다. 조선 의용대가 광복군을 편의표 오니까 광복군에서는 조선 의용대를 광복군 지 1지대 1지들이 편지했습니다. 그래서 광복군 지 2지대, 3지대까지 있죠. 조선 의용대가 광복군 지 1지대가 됐습니다. 그리고 조선 의용대 대장이 어떤 김원봉은 광복군 지 1지대장이 되고 또 겸해서 광복군 2사력은직을 겸직을 했습니다. 또 조선 의용대가 완전히 광복군이 편의하게 구성원들이 된 것이죠. 그래서 좌우, 진영이 서로 무장조직을 가지고 있다가 그 무장조직들이 하나로 통일을 주었습니다. 또 광복군 통일을 잃은 것이죠. 마지막으로 전부로 통일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은시정부가 좌우, 세력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좌우 연합정부를 구성했습니다. 그 시기 44년 4월에 그런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좌우, 세력들이 은시정부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헌법 개정이 필요해서 44년 4월에 헌법을 대한민국 임시원장이라고 헌법을 다시 개정을 했습니다. 그 헌법에 의해서 좌우, 진영이 인사들이 임시정부로 참여할 수 있는 그런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좌우, 진영 인사들도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 될 수 있고 또 임시정부의 행정부서 책임자가 될 수 있고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44년 4월에 좌우, 진영 인사들이 참여하면서 임시정부가 좌우, 세력들이 연합한 그런 대결되었는데 이제 주석은 임시정부의 최고 행정서라는 주석은 백범 김우선생, 이번 한국공립당입니다. 부주석은 우사 김규식 선생님이죠. 김규식 선생님 그 당시의 민족혁명당의 총석이었습니다. 대표치원. 그다음에 좌우, 진영 인사를 중에 김원봉 선생님 같은 경우가 행정부서의 국무부의 국무부자가 맡았습니다. 또 민족혁명당의 최속수는 행정부서 문화 부장에 취임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만 같이 좌우, 진영 인사들이 임시정부에서 부주석 그다음에 행정부서 책임당으로 인명이 되면서 대한민시정부가 좌우, 연합정부로 구성이 되었습니다. 이런 행정부서 책임자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에 각 행정부서마다 직원들이 있잖아요. 그 직원들에도 좌회, 진영, 민족혁명당, 주석민족혀방 동맨, 주석혁명장맨 이런 구성원들이 임시정부의 이런 직원들이 되구렸습니다. 그래서 민실공이 좌회, 진영 세력들이 모두 임시정부로 통일을 이루어서 좌우, 연합정부를 구성한 것이죠. 예사가 말씀드렸던 독립운동전선에서 일살의 걸친 통일운동이 일부는 성공을 받은 경우는 있지만 대체로 결롤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1940년대에 좌우, 세력들이 임시정부로 아주 잘한 통일을 이주게 됐습니다. 이것은 통일운동에 아주 중요한 중요한 성과지요. 더군다나 우리의 독립운동 세력들이 일재로부터 해방될 때 두들 되지 않고 임시정 대한민국의 위성부로 통일 된 모습으로 우리가 해방을 맞았다.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갖고 있습니다. 한 마디 더 말씀드릴 것은 이렇게 다섯 차례의 것쯤 통일운동이 있어서 대한민국의 위성부로 통일을 유었는데 그 통일을 유후에 더 큰 통일을 추진했습니다. 중국 관내 세력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일을 이루었고 그런데 중국 공산단 지역, 소위 화북 지역, 연안을 중심으로 하는 화북 지역에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 세력들이 또 있었습니다. 거기에도 조선 독립 동맹이라고 하는 단체가 있고 조선 독립 동맹의 무장 세력으로 조선 의용물이 있었습니다. 조선 독립 동맹의 대표는 김두봉 선생님이고 조선 의용물 사령관은 무정장분이었습니다. 중요한 세력이 있죠. 또 한 세력은 연해줄, 연해줄 하바로 부스케에서 활동하고 있던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 세력들은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도저히 일본군한테 못 견뎌서 연해줄을 이동했던 세력들이었습니다. 그 세력들이 대체로 채운 건 또 우리가 잘하는 김일성, 이런 분들이 연해줄을 이동해서 하바로 부스케가 가지고 저희 러시아 공대 88여 단에 배속돼서 그쪽에 있었습니다. 대한민수 정부가 통일을 이루고서 그 연안에 있던 조선 독립 동맹 연해줄 세력과도 서로 연기를 이룰 려고 했던 그런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 시도가 먼저 임시종부에서 그 화북지역의 연안에 그런 조선 독립 동맹의 대표를 보내서 서로 연합을 추진했습니다. 그래서 1945년 초에 우리 국무위원 중에 장건상이라고 하는 분을 연압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래서 이 장건상 선생님 연안에 가서 김두공 선생님을 만나가지고 중국 국민당 지역에 있는 대한민수 정부 중국 공산당 지역에 있는 조선 독립 동맹이 서로 연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임시종부에는 광복군, 독립동맹인 조선 의원군, 두 무장 세력이 있는데 두 무장 세력을 압록강으로 집절시켜서 국내를 진독하자 그러한 의미였습니다. 장건상 선생님이 김두봉을 만났을 때 김두봉 선생님이 동일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중교행해서 임시종부 주석을 만나서 그런 일을 협의하겠다 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약속을 한 적이 얼마에 있어서 일본이 행복했다 라고 하는 소식이 전해졌죠. 또 대한민수정부에서 연애주 하라로 부스케 있는 세력들하고도 연결을 추진했습니다. 그래서 임시종부에서 45년 초에 그 이층모라고 하는 인물을 연애주 세력과의 연결을 위해서 비밀리의 연애주로 파견을 했습니다. 이제 이층모라고 하는 분이 역사에 잘 드러나지 않는 분인데 이 분은 주로 만주 연애주에서 활동을 끝냅니다. 그래서 이 분이 1944년도에 중용으로 도망쳐서 중용에 왔습니다. 이제 그 연애주 사장의 상당히 박지호 그래서 대한민주 미시종부에서 연애주 세력과 연결을 위해서 이층모를 비밀리에 파견했습니다. 그래서 이층모라고 하는 분이 중용에서 출발해가지고 연애주까지 갈파하는데 이 분이 내멍구 포드에 포드에 갔을 때 거기서 일본이 행복한다 라고 하는 소식을 거기서 들었습니다. 또 이 연애주에 있던 세력도 임시정부와의 연결을 추진했습니다. 그 선거 세계와 더불어라고 하는 김일성 사서전에 보면 거기에 자기들이 임시정부와 연결하기 위해서 연락원을 파견했다. 그래서 연락원이 청진에 연락원을 청진해 두고 중용에 있는 임시정부와 연락을 도모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라고 하는 얘기했습니다. 바로 이것은 일화 시도들은 일제가 행복함으로서 시절되지는 못했지만 우리 독립운동 세력들이 그 중국때로 연애주 연한 이런 세력들이 합치려고 했던 그런 시도, 그런 노력을 기울였다 라고 하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것이 독립운동 과정에서 추진됐던 그런 큰 성과인데 이러한 성과가 지금 보시는 것이 1948년에 남북 협상이라고 하는 걸 하상하여 남북 협상을 추진했던 것이 짜렁한 게 없는 사람이 게 아니라 독립운동 시기에 서로 토일운동을 추진했던 사람들이 서로 연락해서 추진한 것입니다. 그 남북 협상 때 백범 김구가 북한에 있는 김두공 사서에게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지금 이 편지를 보낼 때 제가 못 썼지만 아마 여기에 그런 내용이 있을 텐데 여기 내용이 무슨 얘기냐면 우리가 전에 중국에서 활동할 때 우리가 지역을 분머라고 그러니까 중경 연한, 지역을 분머라고 우리가 정성단전해서 그래서 지역을 분머라고 또 팝을 팝을 임시성, 조선, 민족, 국민 동무 이런 걸 팝을 분머라고 정성으로 단결해서 정성 단결해서 암노강의 분태를 팝을 시키자 그런 일을 한 적이 있지 않았냐 그래서 지금 우리가 남북으로 갈라졌는데 생각을 내밀어도 수업자 아니야 과거에도 그렇게 서로 통일하자고 했었는데 그래서 우리가 만나자 라고 하는 그런 내용을 보낸 것이죠. 그래서 지금 드리는 말씀은 그 토일운동을 했던 그런 경험이 남북 협상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통일운동은 5차례에 걸쳐서 추진이 됐습니다. 물론 이것이 부분적으로 성공한 경우도 있지만 해처로 결렬됐다가 전국에 40년대 대한민국 수업목으로 완전히 통일을 일웠다 라고 하는 통일운동의 손가락을 걸쳤다 라고 하는 것이죠. 이런 5차례에 걸친 독립운동 과정에서 일어났던 통일운동의 경험은 본인인족에게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고 본인족의 중요한 자산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런 통일운동의 경험 통일운동의 손가락이 우리가 해결해야 될 앞으로의 남북 통일 이런 데도 중요한 해결방안 지의를 찾을 수 있는 그런 지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5차례에 걸친 통일운동을 잘 분석하면 그 손가락을 잘 연구해내면 남북의 통일할 수 있는 방안으로 생겨났다. 그래서 이런 5차례에 걸친 통일운동이 단순히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고 통일을 위한 중요한 자산이다. 또 우리가 그렇게 활용할 수 있어야 됩니다. 또 저는 활용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제 85차 우당 역사문화강좌에서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저는 독립기념관 관장을 맡고 있는 한시준입니다. 오늘 제가 드릴 말씀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추진된 콩일운동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게 직접 대면하고 하는 것이 아니어서 제대로 의사가 전달되고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급적 쉽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독립운동 할 때 아주 중요하게 다른 독립군을 조직한다든지 단체를 조직한다든지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우리 민족이 독립 운동할 때 해결해야 될 과제가 있었습니다. 그 과제라고 하는 것은 사라지다시피 독립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목표가 있잖아요. 독립운동의 목표는 일제한테 빼앗긴 국토를 다시 되찾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통 1차 목표라고 그러죠. 그다음에 되찾은 후에는 우리 민족끼리 살 수 있는 독립국가를 건설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 제일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독립운동의 과제인데 그게 민족을 하나로 대단히 지키는 문제입니다. 독립운동 할 수 있는 독립운동 역량을 한 곳으로 모으는 일이죠. 독립운동 과정에서 민족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슴 이런 정치 사상이 되돌됐잖아요. 그러니까 정치적인 사상, 인형을 달려하는 이 세력들을 통일하고 통합하는 이 문제가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이제 우리 민족의 대단율이 중요한 과제를 데려 된 것은 우리 민족 구성원들이 세계 각지로 흩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제의 침략을 받고 나라를 빼앗기면서 국내 있던 국민들이 세계 각지로 이줄했습니다. 그래서 만주의 서간도, 국간도 지역으로 몇십만에 달하는 한인들이 이줄했고 연예주 지역에도 무슨 블라디볼스터, 우스니스크, 하바로브 스쿨 이런 지역까지 우리 한인들이 이줄했습니다. 중국 대륙 각지에도 청진, 국경, 상해남경 이런 각지역에도 하는 사람들이 가있습니다. 심지어는 미국에도 1903년서부터 많은 한인들이 미국으로 노동 의미를 갖죠. 사람들이 하와이에, 또 미국 본토에, 또는 멕시코에 심지어는 쿠바에까지 가 있었습니다. 우리민족들이 세계 각지로 흩어져 있죠. 그래서 어떻게 각지로 흩어져 있는 이 우리 민족을 하나로 대단결 시키느냐 이것이 독립운동의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이제 그런 과제를 제일 처음 해결하고자 안을 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1917년 7월에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규식, 박은식, 신체호 조소왕, 이런 14명이 대동단결 선언이라고 하는 것을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우리 민족들을 어떻게 대동단결 시킬 수 있을 것이냐 그 방안을 지시한 것이었습니다. 그 대동단결 선언에서 실수했던 방안은 우선 우리 민족의 유일 유일 무의한 기구를 세우자. 유일 무의한 기구라고 하는 것은 대표기구죠. 그래서 그 민족의 대표기구를 어디든지, 연애주든지, 반주든지 어디 대표기구를 하나 세워놓고, 전 세계 각지에 있는 사람들이 대표기구의 명령의 목적을 하고, 또 대표기구의 무슨 시금을 납부하고, 이러면 몸은 각지도 훑어져 있지만 우리 민족의 역량은 한 곳으로 집결시켰습니다. 그게 바로 대동단결 선언의 유지였습니다. 그래서 이 대동단결 선언이 우리 민족의 대표기구를 수립하자라고 제창하옷이라고 해서 학교에서는 이 대동단결 선언을 임시정부 수입을 제창했던 그런 선언이다. 그렇게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대동단결 선언이 세계 각지로, 만주, 미주, 연애주 각지 로 보내졌는데 그 지역에서 여기에서 도미한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대동단결 선언은 실제로 이렇게 민족을 대동단결 시키는, 이런 데까지는 이래서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민족이 대단결을 실현을 했습니다. 바로 그 계기는 우리가 잘하는 성국의 19년 3월 1일날 일어났던 3일 운동이었습니다. 3일 운동은 잘하다 싶이 우리가 독립국이라고 한 것을 선언하고, 또 그 독립국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선언을 전체가 세울들 들어서 대한동립만세를 이치는 만세 쉬운동을 전기했습니다. 그 만세 쉬운동을 국내는 물론이고 소간도, 북한도, 연애주, 심지어 은 미국에서도 그런 쉬운동이 일어났죠. 그게 바로 이런 쉬운동을 통해서 우리 민족이 하나로 대단결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대단결을 이룰 것던 그 상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였습니다. 그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3월 1일 날 독립 선언의 제일 첫 머리가 5등은 자의 아 조선의 독립국인과 조선인의 자주민 임을 선언하는다. 라고 하는 것이죠. 3일 독립선언의 핵심은 바로요 청문장에 있습니다. 청문장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 민족은 일제에게 심민지 지배를 당하고 있지만 우리 민족 늦을 인정하지 않는다. 알아봐는 것이 안 하고 또 두 번째는 우리는 독립국이다. 알아봐는 것을 얘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독립국을 선언하고 실제로 40일 만에 중국 상해에서 그 독립국으로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나라를 권립을 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국가를 유지운 음악위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했습니다. 바로 3일 운동을 통해서 우리 민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수립하고 그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민족의 대단둘이 이루어진 것이죠. 지금 보시는 사진은 1921년 1월달에 새해를 맞아서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모여서 찍은 사진입니다. 여기 보시면 제일 가운데 이슨만 대통령이 있죠. 이슨만 대통령 또 저산한청 후 이분들은 미주 지역에서 더하던 분들입니다. 또 국무총리 이동위 또 팩장 뛰고 계신 분 이분은 연예주에 계신 분 이죠. 또 무슨 이시영 조소왕 이런 분들은 난주에서 활동했던 분들입니다. 또 거기 무슨 현순, 치창식, 신이키 이런 분들은 국내에서 활동 하던 분들이죠. 그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던 분들이 하나로 모여서 단결한 것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였습니다. 또 정치적으로도 국무총리였던 이동위는 연예주에서 1918년에 사회주의를 인용으로 했던 한인 사회당을 조직했던 분들이죠. 또한 이 지역도 인용도 달랐던 분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하는 것으로 대단결을 이루었습니다. 그 이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실을 때는 이후에 다시 통일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통일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경위가 있는데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족 대단결하는 그런 성증으로 수입됐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시일을 가면서 그 기능, 그 역할을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단이었던 대통령 이슬만 박사가 미국에 계셨죠. 실제로 미국에 있으면서 상혜로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대통령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상해에 있는 국무위원들과 미국에 있는 대통령 기간에 갈등이 생기고 국회등이 상당히 심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1925년에 대통령을 투맥하는 그런 일이 벌어졌죠. 바로 그런 문제도 인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족 대단결 그 기능, 그 역할을 제대로 간다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거기에 독립운동 방략, 독립운동을 어떻게 할 것이냐 라고 하는 문제도 의견이 달랐습니다. 어떤 분들은 독립군을 조직해서 일제와 독립전정을 하자 라고 하는 세력들이 있었고 그것은 일제를 상대로 해서 우리가 이기고 시 불가능하니까 세계 열광들에게 우리의 독립울류에서 대교 활동을 벌이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 의견이 다르죠. 또 거기에 지역적인 갈등도 있었습니다. 무슨 기오파, 소오파 그런 갈등도 있었고 정치적인 사상 인연의 사회도 있었습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민족주의계열 또 사회주의계열 또 아낙이쯤 이런 게 들어오면서 정치적인 인연에 따라서 정치적인 목표. 그래서 우리가 독립된 위에 어떤 국가를 건설해야 될 것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서로 달랐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런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담결됐던 것이 다시 흐터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걸 다시 모으고자 통일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 과정에서 실제로 통일운동이 출인됐다는 것이 다섯 차례 있었습니다. 그래서 1923년에 국민 대표회의라고 하는 것이 1차였고 또 20년대 후반에 민족위일당조직운동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통일운동이 전개됐습니다. 그리고 30년대 전방위에는 5개 정당이 통일운동이라고 하는 통일운동 이 있었고 30년대 후반에는 7개 정당이 통일하자고 하는 통일운동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부분적인 송파도 있었지만 대치로 결렬 됐습니다. 그런데 1940년대에 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전개됐던 통일운동에 대해서 간단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첫 번째 통일운동은 1923년 상하위에서 있었던 국민 대표회의 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국민 대표회의가 수립된 것은 임시정부가 민족 대단결체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임시정부 내부에서도 그렇고 일부에서도 그렇고 이제 우리가 세계 각지의 우리 독립운동 세력들이 하나로 통일을 이루어야 된다 그런 논의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런 논의를 제일 처음 한 것은 국정에서 활동하고 있던 박용만 박은식 이런 분들이 군사 단체들을 담아서 군사 통일이라고 하는 걸 했습니다. 거기에서 이제 우리 대한민국 유정부가 수립했지만 국기능과 역할을 못하니까 다른 다른 방법으로 통일을 이루자 라고 하는 것을 제안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국내 각지에서 활동했던 공립운동 단체 그 대표가 큰 자리에 모여서 해에 일 같자 라고 하는 것을 주장 하랬습니다. 또 임시정부 내부에서도 도산안창호 선생을 중심으로 해서 국민 대표 회의를 서집하자고 하는 그런 의미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1923년 1월 달부터 국내 각지에서 140여 개 단체 대표팀을 모였습니다. 거기에는 국내, 중국, 안주, 연애주 심지어는 미국에서 활동한 미국에 있던 도립운동 단체 대표팀을 참여했습니다. 이것은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독립신문인데 독립신문에 보면 축 국민 대표회의 개혜 라고 하는 곳이 있죠. 그래서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 대표팀이 모여서 국민 대표회의를 개최를 해서 여기서 우리 민족의 통일을 이룰 수 있는 방안을 하자. 상당히 큰 기대가 있었습니다. 국민 대표회의는 23년 1월 부터 6월까지 한 6개월 동안 지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핵심적으로 문제가 대륙된 것은 대한민국 의미시정부를 어떻게 할 것이냐 라고 하는 문제가 핵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대한민국 의미시정부의 조직과 기능이 잘못되어 있으니까 그것을 고쳐서 개조해 가지고 대한민국 의미시정부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고 독립운동을 정기하자. 그렇게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죠. 보통 그분들을 개조파 그렇게 부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임시정부가 지기능 역할을 하지 못하니까 임시정부를 아주에 없앱 버리고 새로운 조직체를 교성하자 안 하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분들을 창조파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두 주장이 서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몇 걸 동안 평회선으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창조파 수요끼리 여기서 탈퇴를 해서 연예주로 가서 연예주에서 조선공화국이라고 한 것을 선파렸습니다. 그래서 이 국민 대표의 일을 통해서 통일을 이루고 했던 이러한 시도는 결렬 됐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로 통일운동이 일어나는데 통일운동에 그런 주된 것은 민족 유일당을 조직하자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당을 조직하자 그런 운동이었습니다. 이제 이 운동 일어난 것은 아까 말씀드렸던 이슨만 대통령 문제로 해서 임시정부가 파행을 띄었다가 1925나 3월에 이슨만 대통령을 타냈습니다. 물론 지금도 대통령 타냈다는 것은 엄청 큰 문제죠. 그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대통령 타냈을 둘러싸고 한 5년 이상 끌다가 대통령이 타냈다면서 임시정부는 완전히 파탄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시 수습할 수 있는 방안으로 민족 유일당을 조직하자 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제안했던 분은 실제로 임시정부를 수립총일서부터 조직하고 운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토사한 안창호 선생님이 민족 유일당을 조직하자고 제안을 냈습니다. 또 그것을 당시 대통령을 타냈다고 하고 나서 한종 수방을 국무령이라고 바꿨는데 그 국무령이 취임했던 홍진 선생도 민족 유일당을 조직하자 라고 해서 그 운영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이 운동은 1926년부터 시작돼서 29년 말까지 3, 4년 동안 전 독립 운동 전선에서 출입이 됐습니다. 우선 중국 관내 중국 대륙 지역에서 국견이나 상해나 남련이나 그다음에 한국 이런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우선 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해서 각 지역에서 유일당을 촉성해라고 하는 걸 조직했습니다. 그래서 그 촉성해를 합치면 유일당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운동이 전개됐는데 결국 청구 29년 말에 봉산주의 겨울에서 유일당 운동에서 탈퇴를 했습니다. 탈퇴에서 봉산주의 세력들은 별도로 상해에서 유호 한국 독립운동자 동맹, 호라고 하는 것은 상해를 읽컵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유일당 운동이 분열됐죠. 유일당 운동이 결렬이 됐습니다. 이런 것 와서 봉산주의 세력이 탈퇴하고 나서 대한민국 음식 전문을 중심으로 했던 이동령, 이시영, 진구, 안창호 이런 분들이 한국 독립당을 조직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유일당 운동을 교성하지 못했지만 이런 당들이 교성되는 것이죠. 완주 지역에서도 민족립당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완주 지역은 서부간도를 합치는 지역인데 여기는 크게 참이고 정의부, 신민부, 이 시부소가 완주 지역을 주나라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완주 지역에서는 이 실부를 하나로 통일하자 라고 하는 방법 으로 유일당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게 우리가 아는 산부통합운동이죠. 산부통합운동이 산미부, 정의부, 신문 대표님이 참여했는데 거기에서 통합의 방법을 둘러싸고. 그 일태면 산부를 완전히 해체하고 하나의 단체를 만들 것이냐 아니면 산부가 연합한 형태로 만들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운경이 틀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산부를 연합해서 통일을 이루자 라고 하는 세력들이 중심으로 해서 세부를 통합해서 국민부라고 하는 것을 창립을 했습니다. 그리고 국민부의 행정부서죠. 그리고 국민부의 전의조지처럼 조선, 청룡당이라고 하는 것을 결승을 했습니다. 그때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운 유일당을 조직하자라고 했던 분들은 국만주 쪽으로 가서 거기서 한국 국민부당이라고 하는 것을 바로 결승을 했습니다. 그래서 완주 지역에서도 유일당을 결승하는 운동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유일당 운동이 유일하게 성공한 것은 국내에였습니다. 국내에서도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어서 1927년 2월에 민족주의계열 또 민족주의 조합화계열 거기에 의사의주의계열이 합쳐서 신간해에 하라고 하는 단체를 결승했습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는 이 과정에서 성공한 예는 국내에 신간해 결승이었습니다. 유일당 운동이 신간해 결승으로 해서 19월에 성공한 것이죠. 하지만 완전하게 전 민족이 개동당결한 민족의 유일한 이런 정당한 교수와 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1930년대에 와서 5개의 정당이 통일하기 위한 통일 운동이 또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제 통일 운동이 일어나게 되긴 배경은 20년대 후반에 민족 유일당 을 결성하자 하는 운동은 결렬되고 말았지만 그 여파로 인해서 세계 각지에서 파는 정당들이 결승이 됐습니다. 그래서 오늘 4차례를 보면 빚만주 지역에서는 한국 국립당이 결승 이 됐습니다. 그걸 주도했던 분은 홍진, 인간사라는 지청 전장분, 이분들이 중심 이래서 한 공립당을 결승했고 서간도주역에서는 조선혁명당이라고 하는 정당을 결승됐습니다. 남경에서는 한국혁명당이라고 하는 것이 결승이 됐습니다. 그것을 주도했던 분이 해공신피 선생인데 한국혁명당은 보통 백적 주위, 백은 민족주위, 적은 공산주위, 흙은 무전구주위죠. 이 세세인사들이 합쳐서 만든 것이 한국혁명당이었습니다. 또 이제 남경에서 다시 신한동립당이라고 하는 것이 결승이 됐는데 신한동립당은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한국동립당이 일본이 왜 1931년 에 만주를 심장해서 만주를 점정하잖아요. 호주 활동할 수 없으니까 중국 관계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만주에서 내려온 한국동립당 또 남경에서 활동하고 있던 해공 선생이 주도했던 한국혁명당이 두 방이 합당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한동립당이라고 하는 것이 만들어지고 또 아까 말씀드렸던 유일당 운동이 결렬되고 나서 임시종도 인사들이 한국동립당이라고 하는 것을 결승했습니다. 또 이제 당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것이 대한동립당인데 김위식 박사가 주도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주로 미준 세력들이 주도했던, 미준 세력 후원했던 이런 정당이었습니다. 이제 이 이에 주의한 세력으로 우열단이 있었습니다. 우열단은 잘하시지만 청구 대 19년 말에 김원동을 중심으로 해서 우열투쟁을 정지하기 위해서 줬었던 그런 단체죠. 여기는 주로 청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1930년대 전반기에는 이 독립운동 전선의 많은 정당들이 교성돼서 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정당들을 하나로 통일하자 라고 하는 운동이 일어난 것이죠. 그래서 그것이 다섯 땅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다고 해서 우당 통일 운동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 통일 운동이 일어나게 됐던 계기는 1931년 9월에 일본이 만주로 침략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바로 그걸 계기로 해서 일본이 만주로 침략했는데 우리 독립 운동도 일본과 항전할 수 있는 대일전선을 하나로 통일시켜야 됐다 라고 하는 취지였습니다. 그래서 만주 사변이 일어난 후에 1932년 상회에서 여러 정당들 대표가 모여서 한국 대일전선 통일 동맹이라고 하는 그런 연합치를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각 당 대표 둘로 구성된 것인지 각 당 대표 분들이 참여해서 이제 우리가 일본과 싸우는 대일전선을 하나로 통일해야 됐는데 그러면 다섯 개 종당을 하나 더 통일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런 취지로 출발을 했지만 바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1932년 4월에 윤봉기 회사가 상회에서 일본 부스는 애들을 처단하는 의무를 일으킨 후에 일본 경찰이 임시종 부여인들을 체포하고 하려니까 임시종 부여인들을 또 독립운동했던 분들이 상회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항주, 가흥, 진강, 당정 이런 식으로 다 평산이 됐죠. 그래서 이 사람한테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다가 이제 한 2, 3년 흘러서 남경에서 그 다섯 개 종당들이 모여서 통일하는 모임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소위 오당 통일의 일을 넣은 것이죠. 거기에 핵심은 다섯 개 종당을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운 당일당을 만들자 라고 하는 것이 오당 통운동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일당을 만드는 통일해서 당일당을 만드는 전제로 그 전에 있던 임시종부는 어떻게 할 것이냐. 임시종부는 피지하자 라고 하는 것이 전제였습니다. 그런데 임시종부에서 특히 한국 임시종부는 웅호이중하는 것이 한국동인당이잖아요. 그래서 한국동인당에 특히 그런 이동농, 이시영, 김구 이런 분들은 임시종부는 해체할 수가 없다. 그래서 거기에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은 오당 통일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다섯 개 종당들은 다 통일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1935년 7월에 그 다섯 개 종당이 완전히 종당을 해체하고 하나로 통일 된 조직체를 결정했습니다. 그 이름이 민족 통일운동 당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쨌든지 일부 임시종부를 웅호이중하는 인사들이 참가하지 않았지만 다섯 개 종당이 완전히 해체하고 하나의 통일을 이룼던 것이 민족 혁명당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통 의미를 통일전소를 이룬 통일전소를 종당이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말씀드리는데 또 뭐 종당일이, 단체리 종당일이 많고 해서 좀 혼란스러우시죠?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많은 당들이 만들어지고 해서 그래서 사실은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복잡하지만 그래서 제가 하루종 이야기 쉬우시도록 그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민족 혁명당으로 통일을 이룬었지만 그것이 와야가 됐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제 제 4차 통일운동 일어나고 그때는 7개 종당이 통일하자고 하는 친당 통일운동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통일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계기는 민족 혁명당이 통일전선 종당으로 결성이 됐지만 얼마 안 가서 해체가 됐습니다. 그래서 35년 7월에 민족 혁명당이 결성이 됐는데 2달 후에 35년 9월에 거기에 참여했던 조소왕 홍진, 이룬인들이 탈당을 했습니다. 탈당했던 이유는 우리가 민족 혁명당에 참가해 보니 민족 혁명당이 공산주의 세력들이 맞고 방향이 공산주의 쪽으로 간다. 그래서 홍진, 조소왕 이룬인들이 탈당을 해서 한국동립당을 제공했습니다. 그 한국동립당이라고 하는 것은 1930년에 임시정부 이룬인들이 만들었던 종당이죠. 그게 민족 혁명당에 참여해서 해체가 됐었는데 이 조소왕 홍진 이분들이 탈당을 해서 한국동립당을 제공했습니다. 그래서 민족 혁명당이 분열된 것이죠. 또 이제 35년 11월에 달리면 민족 천면장에 참여하지 않았던 임시정부를 폐지할 수 있다. 아랍에서 참여하지 않았던 이동영, 이시영, 김구, 송명조, 차리석 이런 분들이 한국국민땅을 결성했습니다. 그래서 한국국민땅을 결성해서 이제 우리 한국국민땅을 중심으로 해서 임시정부를 유지오고시켜가자. 그래서 한국국민땅이 탄생이 됐습니다. 그다음에 37년에는 민족 혁명당에 참여했던 만주 지역에서 활동했던 제이력들 이슬리들이 보통 조선 혁명당인데 그 제이력들이 탈당을 했습니다. 또 우리가 아는 이청천 장군, 유동열 장군, 최동우 이런 분들이 다 만주에서 활동했던 분들이잖아요. 이분들이 민족 혁명당에 참여해서 민족 혁명당에서 각각을 임, 민족 혁명당은 김원봉이 주도하고 자기에게 할 수 있는 역할이 없고 정치적인 인형으로도 맞지 않죠. 그래서 이분들이 탈당을 해서 이에 서간도에서 결성됐던 조선 혁명당이라고 한 이름으로 다시 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민족 혁명당이 이제 다 통일 전선 최에서 다시 분열이 된 것이죠. 이제 그 이에 독립운동 전선에서 조선 민족 해방운동이라고 하는 단체가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은 김성숙이라고 하는 분이 주도미도에서 만든 단체고 조선 청년 전위 동맹이라고 하는 단체도 만들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여기도 치창익의 부인이었던 허종숙, 이분들이 결성하는 곳인데 치창익이나 허종숙은 국내에서 조선 공산당을 결성해서 활동했던 분들이죠. 또 공산주의 단체였습니다. 또 여기에 이제 아나키즘을 기반으로 해서 활동하던 세력들이 조선 청명자 연맹이라고 하는 것을 유자명선생이 주도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민족 혁명당을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었다가 다시 민족 공인당이 와야 되고 공산주의 아나키즈트 이런 세력들이 여러 정당 단체들을 만들어서 다시 공인 운동 전선에는 여러 정당 단체들이 생겨나게 됐습니다. 그것이 대략 7개가 됩니다. 그래서 7개의 정당 단체가 통일하자고 하는 그런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죠. 이제 그 통일 운동이 일어나게 됐던 직접적인 계기는 중일전쟁이었습니다. 1937년 7월 7일 날 일본군이 국경교회의 노국회라고 하는 데서 중국 군들을 공격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때 중국군이 전면적으로 일본하고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중일전쟁이 일어났죠. 그 중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동립운동 세력들은 이제 그 중일전쟁이 우리 한국의 동립을 생취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계기가 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 좋은 계기가 우리가 7개의 세력으로 남여져 있는데 그 세력을 하나로 통일시켜야 되겠다. 그러니까 동립운동 영향을 하는 것은 결정시키는 게 필요하다. 안 하고 하는 그런 분위기였죠. 그래서 다시 통일운동이 일어나게 됐습니다. 그때 통일운동이 일어났을 때 먼저 우익진영은 우익진영대로 좌익진영은 좌익진영대로 먼저 연합체를 결정했습니다. 이제 연합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조직을 가지고서 하나로 합치는 것이죠. 우익진영의 한국국민당, 한국북립당, 조선팀 명당 또 여기에 미주 지역에 한인, 미주 지역의 단체들이 있죠. 이 단체들 6개가 거기에 도입을 했습니다. 그래서 9개 정당 단체가 모여서 한국 광보운동 단체 연합회 라고 하는 조직을 결정했습니다. 37년 9월에 남중에서의 결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약층에서 광복진선 그렇죠. 그저 광복진선이라고 하는 것은 우익진영의 3개 정당이 중심이 되고 미주 지역의 6개 단체가 참여했던 그런 연합체였습니다. 좌익진영도, 좌익진영도 연합체를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11월에 민족혁명당 또 조선민족 해방 동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 청년전이 동맹 그 4개 단체들이 연합해서 연합체 명칭을 조선 민족 전선연맹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래서 이제 연합책이 되지만 중일전정을 개기로 해서 좌익진영이 서로 연합체 양대 진영을 청소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연합한 수의 그 7개 정당을 하나로 통시키기 위한 운동이 일어났지만 그것도 제 교부 시댕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해서 일본 군의 전문지가 확대됐잖아요. 그래서 확대되면서 임시정부를 비롯해서 독립운동시력들이 일본군 전문지역을 피해서 피난을 다녔습니다. 피난을 다녀라고 통일회의를 할 수가 없었죠. 그다그 통일회의가 송사가 되는 것은 1939년 8월에 중국 사천성 기강이라고 하는 곳에 와서 그렇습니다. 이제 일본군의 전문지역을 피해서 피난을 다녔던 독립운동시력들이 대체로 1939년 5월이면 그 사천성 기강에 도착합니다. 그 기강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지수도로 쓰고 있던 충청, 거기에서 바로 그 남쪽으로 한 100mm 정도 떨어지는 조그만 도시입니다. 거기는 전란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것이죠. 그래서 오랜 기간 동안 피난단에다가 기강에 정착하면서 뒤로서 안정을 찾게 됐습니다. 그때 거기서 칠단들이 서로 통일을 이루자고 하는 통일회의를 개최했습니다. 그 통일회의는 먼저 우익진영, 좌회진영을 우익진영이는 대표가 백범 김두구 또 좌회진영은 약산 김원봉이죠. 그래서 이 두 분이 만나서 우리 좌우로 연합했던 이 7개 정당을 하나로 통일시키자 라고 하는데 합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합의를 해서 동지,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신이라고 하는 것으로 발표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어떠한 방법으로 통일을 주자, 라고 하는 부분은 원칙까지 그걸 다 제시가 되어 있었죠. 그래서 그 합의에 의해서 39년 8월달의 기강에서 슬픈 대표들이 모여서 통일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때 우익진영에서는 한국국민당, 한국국립당, 조선욕명당, 위시랑이 또 좌익진영에서는 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북맨, 조선혁명자연맨, 조선청련전의동맹. 그래서 이 계단체가 모여서 통일회의를 했습니다. 그 통일회의의 핵심은 우리 7개 정당 단체를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운 단일당을 만들자, 라고 하는 것이 통일운동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견이 나타나게 된 것은 그럼 만일 7개 정당이 완전히 해체하고 단일당을 결성했을 때 그 동일운동은 누가 출도할 것이냐, 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익진영에서는 우익진영은 대한민국임수정부를 공호, 유지하고 된 세력도 있죠. 그리고 우익진영에서는 독립운동은 대한민국임수정부가 주도해야 됩니다. 아라고 하는 주장이고 또 좌익진영에서는 실당을 해체하고 사로이 결성된 단일당의 통일운동을 주도해야 됩니다. 아라고 하는 것으로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어디에 둘 것이냐, 아라고 하는 것까지도 이견이 났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이견이 접혀지지 못하고 좌익진영이 탈퇴을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칠당통일의의도 결렬이 되고만 알았습니다. 그 칠당통일의의에 대해서는 아주 그 구체적이고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건 중국 쪽에서 작성하는 것인데 이제 제목을 보시면 이게 기강 한국 칠당통일의의 경과 보고서 아라고 하는 것인데 요건 중국 쪽에서 한국 사람들이 칠당통일의의하는 것에 대해서 상세하게 조사해서 그 보고서를 남기고 싶습니다. 거기에 헤이 대표는 누가 참여하고 각 정당의 통일에 대한 이견은 어떻고 또 그것이 왜 결렬이 됐는지 라고 하는 상세한 그런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제 네 차례에 걸친 통일운동이 물론 부분적으로 소c가를 거뒀지만 대출의 완전한 통일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완전한 통일을 이룬 것은 1940년대 충청에서 했습니다. 중경에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시력들이 완전히 하나로 통일을 이루게 됐습니다. 그 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일을 이루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때 40년대에 일어났던 그 통일운동을 제5차 통일운동이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는데 그때 통일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 계기는 1942년 12월 8일 날 미국과 일본 간에 전쟁이 일어났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본이 미국의 해군기지가 있던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공격을 받은 미국이 이제 일본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하고 일본과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미국과 일본 간에 전쟁이 일어났죠. 그 미일간의 전쟁이 택평양 상에서 주로 이루어져 가지고 흔히 택평양전쟁 그렇게 해도 부릅니다. 그런데 이 미일간의 전쟁은 한국의 독립운동자들한테 엄청나게 좋은 기회를 이루게 됐습니다. 우리가 독립을 증치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다, 저런 기회다 라고 생각을 하고 그래서 이 미일전쟁 발발했을 때 그 좋은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용량을 한국수를 집결시켜야겠다 라고 하는 그런 논리가 일어났습니다. 그때 문제가 그럼 민족의 용량을 어디로 집결시켜야 됐냐 라고 하는 문제였는데 그걸 가장 먼저 제기한 것이 조선 민족 해방 동맹 또 김석수 선생님의 입근은 거기였습니다. 그래서 조선 민족 해방 동맹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웅호 선언 이라고 하는 것을 받들였습니다. 거기 핵심적인 요지는 이제 미일전쟁이 발발해서 우리도 공립전쟁에 참여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용량을 한국을 수익을 집결시켜야 되는지 집결시킬 수 있는 곳은 어디냐 그 집결시킬 수 있는 곳은 정당보다는 그래도 정부가 정부가 권익가 있지 않냐 그래서 용량을 결집시킬 수 있는 곳은 대한민국의 유치성부다 아라고 하면서 조선 민족 해방 동맹은 임시정부에 참여할 거다 라고 하는 것을 먼저 선언했습니다. 또 이제 좌회진영을 주도하고 있던 민족혁명당 그건 약산 김용봉 선생님이 입근은 민족혁명당이죠. 민족혁명당에서도 미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우리를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하는 것을 교정하고 위해서 당 대표 대회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 대표 대회에서 우리 민족혁명단도 임시정부를 참여해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 용량을 결집하자 라고 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40년대 미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이 좌회진영에서 우리가 임시정부를 참여하겠다 라고 하는 뜻을 밝히고 그 좌회진영이 임시정부를 참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임시정부를 참여하는 과정이 그 과정이 있습니다. 그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임시정부라고 하는 것이 임시정부는 행정부잖아요. 임시정부는 당정부 그래서 당에 해당되는 것은 임시의정원 임시정원이라고 하는 것이 국회지 않습니까 그래서 임시정부의 국회라고 하는 것이 있고 또 정부는 임시정부 행정부가 있고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로 한국광복군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임시정부가 크게 당정부 이라고 하는 조직체로 가지고 있는데 그 좌회진영이 어디에 참여할 것이냐. 그래서 가장 먼저 참여한 것은 임시의정원 국회로 먼저 참여를 했습니다. 그래서 1942년 10월달에 임시의정원 제34차 정기 의회가 열렸습니다. 그 임시의정원도 국회고 내년도 임시의회 정기 의회를 하죠. 정기 의회는 10월달에 했습니다. 그래서 42년 10월달에 34차 정기 의회가 열릴 때 좌회진영 의원들이 그 위에 참여하는 것이죠. 그동안 임시의정원은 한국동립당 한국국민당 그러니까 한당 임시정부로 온무하는 그러니까 한당이 임시의정원을 조직하고 운영했습니다. 저희 일당체지로 운영이 됐던 것이죠. 거기에 이제 좌회진영의 민족혁명당 조선민족 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맨 이런 인사들이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이 돼서 의회에 참여를 했습니다. 그리고 좌회진영 의사들도 참여를 의정원 의원으로 참여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34차 의회가 좌우 세력들이 통일을 이룬 통일 의회가 됐습니다. 그래서 의의로 먼저 통일을 이룬 것이죠. 잠깐 빛나가는 얘기이지만 이 42년도에 임시의정원으로 통일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우리 한국정치사, 특히 정당사회에서 논란 변합니다. 그동안 임시의정원, 그 국회가 그 이전까지는 일당체지로 운영이 돼 왔습니다. 그런데 좌회진영의 민족혁명당 조선 민족 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맨 이게 참여하면서 일당체제에서 가당체조를 변한 것이죠. 또 좌회진영의 정당들이 참여하면서 여당과 야당이 생겨났습니다. 여당은 지금까지 임시정부를 요구 유지해왔던 한국공직당의 여당 역할을 하는 것이고 좌회진영의 민족혁명당 조선 민족 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맨 이런 정당 단체들은 야당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소위 정당사회에서 특히 임시의정원, 국회로 운영하면서 여당과 야당이 생겨났고 또 그런 체대로 운영이 되겠다. 이것은 우리나라 의해 발전사에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 여당과 야당이 서로 지금도 국회에서 여당, 야당이 서로 대립하고 하잖아요. 당시 의정은 운영도 지금 국회못지 않게 여야의 대립 활동 상당히 대단했습니다. 지금 보시는 사진은 34차 임시의정원힘 좌우가 통일해서 개차하는 회의죠. 그래서 그 34차 의정원 의원들이 참여해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거기에 보면 가운데 백범 김무선생 임시현모 주석이고 그 옆에 있는 홍진이라고 하는 분은 임시의정원 의자인 것 그렇죠. 맨 오른쪽에 다 보일 수는 모르겠는데 맨 오른쪽에는 김웅목, 민족혁명당의 총성 있죠. 이 분이 계시고. 여기 여기 보면 김성숙 이 분은 조선 민족 해방 동맹의 주도자시고 여기 유잘명 선생님 여승 조선 훈련자, 연맹, 아나키스트 그런 분들이 다 함께 참여하셨습니다. 그래서 의정원으로 통일을 이루었던 이 모습입니다. 다음으로는 무장 세력이 좌익진의 무장 세력이 광복으로 편입하면서 조선이 군사적으로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잘하시지만 좌익진영에서는 1938년 10월 달에 그 한콕을 하는 곳에서 조선 의용대라고 하는 무장조직을 겹승했습니다. 광복군보다 2년 앞서서 좌익진영인 무장조직을 겹승했죠. 그 조선 의용대는 대체로 많은 청년들을 기반으로 해서 겹승이 되어 있고 조선 의용대가 중국전선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경력을 모집하고 해가지고 많을 때는 경력이 330명 정도가 됐습니다. 그 다음에 1941년 3월 달, 5월 달에 그 대원들 상장수가 황화를 건너가지고 태양산지용으로 이동을 했죠. 화복지용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조선 의용대는 중국 관내에서 한국인들이 제일 처음으로 조직했던 무장조직이었습니다. 그 무장조직이 1942년 7월 달에 광복군로 편의했습니다. 이제 광복군로 군사 통일을 이룬 것이죠. 그때 이제 조선 의용대 개편 선언이라고 하는 것으로 발표하고 우리 지금까지 조선 지금까지 유지해왔던 조선 의용대는 해체하고 광복군로 편의파다. 그래서 우리 조선 의용대는 어떻게 할 것이냐. 우리는 정성 단결해서 우리의 민정 용량을 광복군로 집결해가지고 우리가 독립전쟁을 수행하는데 우리가 조석이 되자. 이제 그랬습니다. 조선 의용대가 광복군을 편의표 오니까 광복군에서는 조선 의용대를 광복군 지 1지대 1지들이 편지했습니다. 그래서 광복군 지 2지대, 3지대까지 있죠. 조선 의용대가 광복군 지 1지대가 됐습니다. 그리고 조선 의용대 대장이 어떤 김원봉은 광복군 지 1지대장이 되고 또 겸해서 광복군 2사력은직을 겸직을 했습니다. 또 조선 의용대가 완전히 광복군이 편의하게 구성원들이 된 것이죠. 그래서 좌우, 진영이 서로 무장조직을 가지고 있다가 그 무장조직들이 하나로 통일을 주었습니다. 또 광복군 통일을 잃은 것이죠. 마지막으로 전부로 통일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은시정부가 좌우, 세력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좌우 연합정부를 구성했습니다. 그 시기 44년 4월에 그런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좌우, 세력들이 은시정부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헌법 개정이 필요해서 44년 4월에 헌법을 대한민국 임시원장이라고 헌법을 다시 개정을 했습니다. 그 헌법에 의해서 좌우, 진영이 인사들이 임시정부로 참여할 수 있는 그런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좌우, 진영 인사들도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 될 수 있고 또 임시정부의 행정부서 책임자가 될 수 있고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44년 4월에 좌우, 진영 인사들이 참여하면서 임시정부가 좌우, 세력들이 연합한 그런 대결되었는데 이제 주석은 임시정부의 최고 행정서라는 주석은 백범 김우선생, 이번 한국공립당입니다. 부주석은 우사 김규식 선생님이죠. 김규식 선생님 그 당시의 민족혁명당의 총석이었습니다. 대표치원. 그다음에 좌우, 진영 인사를 중에 김원봉 선생님 같은 경우가 행정부서의 국무부의 국무부자가 맡았습니다. 또 민족혁명당의 최속수는 행정부서 문화 부장에 취임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만 같이 좌우, 진영 인사들이 임시정부에서 부주석 그다음에 행정부서 책임당으로 인명이 되면서 대한민시정부가 좌우, 연합정부로 구성이 되었습니다. 이런 행정부서 책임자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에 각 행정부서마다 직원들이 있잖아요. 그 직원들에도 좌회, 진영, 민족혁명당, 주석민족혀방 동맨, 주석혁명장맨 이런 구성원들이 임시정부의 이런 직원들이 되구렸습니다. 그래서 민실공이 좌회, 진영 세력들이 모두 임시정부로 통일을 이루어서 좌우, 연합정부를 구성한 것이죠. 예사가 말씀드렸던 독립운동전선에서 일살의 걸친 통일운동이 일부는 성공을 받은 경우는 있지만 대체로 결롤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1940년대에 좌우, 세력들이 임시정부로 아주 잘한 통일을 이주게 됐습니다. 이것은 통일운동에 아주 중요한 중요한 성과지요. 더군다나 우리의 독립운동 세력들이 일재로부터 해방될 때 두들 되지 않고 임시정 대한민국의 위성부로 통일 된 모습으로 우리가 해방을 맞았다.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갖고 있습니다. 한 마디 더 말씀드릴 것은 이렇게 다섯 차례의 것쯤 통일운동이 있어서 대한민국의 위성부로 통일을 유었는데 그 통일을 유후에 더 큰 통일을 추진했습니다. 중국 관내 세력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일을 이루었고 그런데 중국 공산단 지역, 소위 화북 지역, 연안을 중심으로 하는 화북 지역에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 세력들이 또 있었습니다. 거기에도 조선 독립 동맹이라고 하는 단체가 있고 조선 독립 동맹의 무장 세력으로 조선 의용물이 있었습니다. 조선 독립 동맹의 대표는 김두봉 선생님이고 조선 의용물 사령관은 무정장분이었습니다. 중요한 세력이 있죠. 또 한 세력은 연해줄, 연해줄 하바로 부스케에서 활동하고 있던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 세력들은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도저히 일본군한테 못 견뎌서 연해줄을 이동했던 세력들이었습니다. 그 세력들이 대체로 채운 건 또 우리가 잘하는 김일성, 이런 분들이 연해줄을 이동해서 하바로 부스케가 가지고 저희 러시아 공대 88여 단에 배속돼서 그쪽에 있었습니다. 대한민수 정부가 통일을 이루고서 그 연안에 있던 조선 독립 동맹 연해줄 세력과도 서로 연기를 이룰 려고 했던 그런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 시도가 먼저 임시종부에서 그 화북지역의 연안에 그런 조선 독립 동맹의 대표를 보내서 서로 연합을 추진했습니다. 그래서 1945년 초에 우리 국무위원 중에 장건상이라고 하는 분을 연압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래서 이 장건상 선생님 연안에 가서 김두공 선생님을 만나가지고 중국 국민당 지역에 있는 대한민수 정부 중국 공산당 지역에 있는 조선 독립 동맹이 서로 연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임시종부에는 광복군, 독립동맹인 조선 의원군, 두 무장 세력이 있는데 두 무장 세력을 압록강으로 집절시켜서 국내를 진독하자 그러한 의미였습니다. 장건상 선생님이 김두봉을 만났을 때 김두봉 선생님이 동일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중교행해서 임시종부 주석을 만나서 그런 일을 협의하겠다 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약속을 한 적이 얼마에 있어서 일본이 행복했다 라고 하는 소식이 전해졌죠. 또 대한민수정부에서 연애주 하라로 부스케 있는 세력들하고도 연결을 추진했습니다. 그래서 임시종부에서 45년 초에 그 이층모라고 하는 인물을 연애주 세력과의 연결을 위해서 비밀리의 연애주로 파견을 했습니다. 이제 이층모라고 하는 분이 역사에 잘 드러나지 않는 분인데 이 분은 주로 만주 연애주에서 활동을 끝냅니다. 그래서 이 분이 1944년도에 중용으로 도망쳐서 중용에 왔습니다. 이제 그 연애주 사장의 상당히 박지호 그래서 대한민주 미시종부에서 연애주 세력과 연결을 위해서 이층모를 비밀리에 파견했습니다. 그래서 이층모라고 하는 분이 중용에서 출발해가지고 연애주까지 갈파하는데 이 분이 내멍구 포드에 포드에 갔을 때 거기서 일본이 행복한다 라고 하는 소식을 거기서 들었습니다. 또 이 연애주에 있던 세력도 임시정부와의 연결을 추진했습니다. 그 선거 세계와 더불어라고 하는 김일성 사서전에 보면 거기에 자기들이 임시정부와 연결하기 위해서 연락원을 파견했다. 그래서 연락원이 청진에 연락원을 청진해 두고 중용에 있는 임시정부와 연락을 도모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라고 하는 얘기했습니다. 바로 이것은 일화 시도들은 일제가 행복함으로서 시절되지는 못했지만 우리 독립운동 세력들이 그 중국때로 연애주 연한 이런 세력들이 합치려고 했던 그런 시도, 그런 노력을 기울였다 라고 하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것이 독립운동 과정에서 추진됐던 그런 큰 성과인데 이러한 성과가 지금 보시는 것이 1948년에 남북 협상이라고 하는 걸 하상하여 남북 협상을 추진했던 것이 짜렁한 게 없는 사람이 게 아니라 독립운동 시기에 서로 토일운동을 추진했던 사람들이 서로 연락해서 추진한 것입니다. 그 남북 협상 때 백범 김구가 북한에 있는 김두공 사서에게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지금 이 편지를 보낼 때 제가 못 썼지만 아마 여기에 그런 내용이 있을 텐데 여기 내용이 무슨 얘기냐면 우리가 전에 중국에서 활동할 때 우리가 지역을 분머라고 그러니까 중경 연한, 지역을 분머라고 우리가 정성단전해서 그래서 지역을 분머라고 또 팝을 팝을 임시성, 조선, 민족, 국민 동무 이런 걸 팝을 분머라고 정성으로 단결해서 정성 단결해서 암노강의 분태를 팝을 시키자 그런 일을 한 적이 있지 않았냐 그래서 지금 우리가 남북으로 갈라졌는데 생각을 내밀어도 수업자 아니야 과거에도 그렇게 서로 통일하자고 했었는데 그래서 우리가 만나자 라고 하는 그런 내용을 보낸 것이죠. 그래서 지금 드리는 말씀은 그 토일운동을 했던 그런 경험이 남북 협상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통일운동은 5차례에 걸쳐서 추진이 됐습니다. 물론 이것이 부분적으로 성공한 경우도 있지만 해처로 결렬됐다가 전국에 40년대 대한민국 수업목으로 완전히 통일을 일웠다 라고 하는 통일운동의 손가락을 걸쳤다 라고 하는 것이죠. 이런 5차례에 걸친 독립운동 과정에서 일어났던 통일운동의 경험은 본인인족에게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고 본인족의 중요한 자산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런 통일운동의 경험 통일운동의 손가락이 우리가 해결해야 될 앞으로의 남북 통일 이런 데도 중요한 해결방안 지의를 찾을 수 있는 그런 지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5차례에 걸친 통일운동을 잘 분석하면 그 손가락을 잘 연구해내면 남북의 통일할 수 있는 방안으로 생겨났다. 그래서 이런 5차례에 걸친 통일운동이 단순히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고 통일을 위한 중요한 자산이다. 또 우리가 그렇게 활용할 수 있어야 됩니다. 또 저는 활용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