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회 일제강점기의 저항문학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1-05-07
조회: 3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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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일제강점기의 저항문학
목차
1. 일제강점기의 문학 검열과 저항문학
2. 한용운의 시집
[자막]
안녕하십니까. 오늘 87자 우당 역사 문학강좌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저항문학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서울 여대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지금은 문학평론활동만 하고 있는 이송원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이렇게 5가지 정도로 정리가 됩니다. 그래서 한용훈, 심훈, 이육사, 윤동주. 일제강점기의 저항문학은 여러 가지 내용이 있지만 그걸 다 말씀드릴 수는 없고 그다음에 또 어느 국부적인 내용만 말씀드려도 안 되고 그래서 중요한 것, 대표적인 것을 4개 정도 추려왔습니다. 우선 일제강점기의 작품이 마음대로 발표된 것이 아닙니다. 국권 상실 이전에 이미 신문지법과 출판 법이 제정이 돼서 작품 발표는 이 법에 의해 적용을 받았어요. 사전검열이 원칙입니다. 신문지법과 출판법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신문에 연재됐다가 단응본으로 내는 경우에는 두 차례 검열을 받았습니다. 1926년 이전에는 총독부의 고등경찰과 그다음에 지방의 경찰 기관에서 개별적으로 검열을 진행했는데 3일 운동 이후에 출판물이 많아지니까 그걸 통제하기 위해서 1926년 4월에 총독부 경무국의 도서과를 신설했어요. 이 관은 검열 업무를 중점적으로 했고 그래서 검열이 더 엄격해졌습니다. 검열에 걸린 출판물은 되게 작품의 부분 삭제 또는 게제풀과 더 나가서 배포 금지 출판 금지 심지어는 출판위원회 구속이나 출판사 폐업으로 이어졌습니다. 검열의 기준을 한번 예시해 보면 1925년에서 26년 사이에 검열에 걸려서 게제가 안 된 작품들을 어떤 기준으로 검열했느냐. 그래서 지금 보시는 것처럼 조선의 독립을 풍자해서 단결투쟁을 종영하는 것 총독 전치를 저주한 배일적인 것, 빈공을 노래하고 개급식을 도발하는 것 그러니까 일제하의 저항의식을 조금이라도 나타낸 것이면 다 검열에 걸려서 제재조치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작가들이 작품을 통해서 저항의식을 표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일제강점기의 저항문학이 사실은 많지가 않습니다. 이 검열 제도 때문에 그래서 작가들은 검열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 좋지 않는, 말하자면 검열에 걸릴 만하다 그러면 그걸 뺐고 신문사나 출판사도 편집인들이 자체 검열을 시행을 했습니다. 문학인들은 어쩔 수 없이 우회적인 방법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을 했어요. 그런데 소설은 사건을 제시하니까 사건을 우회적으로 보여줄 수는 없죠. 그래서 소설보다 시, 시는 비우나 암시의 기법을 활용하기 때문에 그런 우회적인 방법을 좀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의 저항의식이 나타난 것이 사실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작품의 숨겨진 저항음위를 찾아내는 작업이 필요하죠. 이 이상화의 뺏긴더라도 보면 어느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개별 1926년 6월에 발표되었는데 이제는 누가 읽어도 조항시다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맨 처음에 뺏긴더라도 봄은 오는가라고 시작해서 끝에 가면 데를 뺏겨 봄조차 뺏기겠네. 국토를 뺏긴 식민지의 상황을 그대로 이야기하면서 땅을 뺏겼으니 우리에게는 맞이할 봄도 없다. 이런 내용이니까 분명한 저항시지요. 그런데 이 저항시가 어떻게 개벽지의 26년에 발표될 수 있었느냐 이것은 우연의 결과입니다. 6월에 발행된 개벽 70포는 사전에 전문 압수조치가 내렸어요. 그런데 검녈 결과가 나오기 전에 실수로 독자들이 독자들에게 우송이 되었어요. 이게 실수로 우송을 했는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여하튼 그렇게 독자들에게 먼저 우송된 그 판 본이 남아 있어서 원전이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검녈의 틈을 뚫고 그 문화기를 드러내고자 했은 그런 문화긴들 의뢰 고민을 이해하고 작품에 숨겨진 의미를 정당하게 찾아내서 그걸 해석해야 할 의무가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우선 한용훈의 시집 니매침무 그 다음에 그분의 소설 흑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용훈은 1879년 출생이니까 이분은 나이가 1920년대에 40대가 됐어요. 그러니까 1920년대에 20대의 젊은 시인들하고는 그 위상이 다른 분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1919년 3월 1일 독립선은 민족 대표로 참여해서 그 현장에서 체포됐고 2년 가까이 옥골을 치르고 1921년 12월에 가출옥이 됐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일을 하다가 1925년에는 서락산 백담사 오세함에서 원고 집힐에 매진합니다. 그래서 이제 선가의 개송본문의 주회를 달은 시편담 주회 이럴 썼는데 이것이 탈고된 날짜가 그 책의 후기에 있는데 1925년 6월 7일로 되어 있습니다. 저래서는 주로 음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 날짜도 음력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제 니매 침묵의 원고를 탈구한 것은 을축년, 을축년이 1925년이에요. 8월 29일 밤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시편담 주회에서 니매 침묵까지 한 석 달 가까운 2달 21 정도의 시간이 있어요. 이 원고가 시집으로 관행된 것은 이듬해 5월입니다. 그때는 출판사정이 어려워서 원고가 책으로 조판될 때 아주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그러면 만회 한용원 선생님이 이 시의 원고로 쓴 것은 오세함에 있던 한 2달 20일 정도의 기간 동안 여름에서 가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써서 원고를 맞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원고의 한용원 선생님의 어떤 정신이 담배가 있는 것이죠. 그 시집에 군말이라는 게 있어요. 군말, 군말이라는 건 서문에 해당하는데 거기서 무슨 말을 했느냐 이게 군말의 전부입니다. 여기 기루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기루다라는 것은 쉽게 사랑한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될 겁니다. 아끼고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석가가 사랑하는 것은 중생이고 침투가 아끼고 위한 것은 철학이고 장미영화가 좋아하는 건 봄피고 마치니, 마치니는 19세기 말에 이태리의 통 이룬동을 한 애국자입니다.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마치니가 사랑한 것은 이미 이태리다. 그러면 내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냐. 바로 조국이죠. 그 말은 할 수 없어요. 그 말을 하면 검녀래 걸리니까 비행 돌려서 독자들도 지금 자유연회를 한다고 하는데 그 자유연회의 대상이 님이 정말 님이냐. 너의 그림자가 아니냐 이렇게 질문을 하고 나는 해점은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하면 어린 양이 사랑스러워서 그 어린 양을 아끼고 이 실을 쓴다. 그러니까 이 해점은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하면 어린 양, 이것은 결국 나라를 잃고 하면 국민들, 민족들, 중생들이죠. 그 중생들을 위해서 실을 쓴다. 라고 밝힌 것입니다. 그 점에서 그 점에서 정식으로 소술하지 않고 비행 돌려서 우회적으로 말을 했어요. 그러면 이제 한영훈 선생의 시에 나오는 구절들 님의 침묵, 유명한데 거기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냐 했습니다. 유명한 구절이죠. 국가는 망했지만 그 망한 국가는 내 마음속에 뚜렷히 살아있다. 제국절을 못 얘기는 사랑의 노래는 내가 아무리 억제하려고 해도 저절로 소사 나오는 사랑의 노래는 침묵하는 님 주위에 계속 돌고 둔다. 님에 대한 사랑의 노래는 끝없이 울려 퍼진다. 이런 뜻이죠. 타고 나면 제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제가 기름이 되니까 타면 또 타고, 타면 또 타고 제가 기름이 되고, 제가 기름이 되니까 그치지 않고 계속 타는 것이죠.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것은 뭐냐. 나의 마음, 나의 가슴이에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바로 아까 말한 조국, 민족, 중생 그 어두운 밤을 지키는 등불 노릇을 내시가 하고 싶다.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나는 님을 기다리면서 괴로움을 먹고 살이 찌고 어려움을 입고 키가 큰다. 님을 기다리는 게 쉬운 게 아니에요. 그런데 내가 님을 기다리는 것은 억지로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저절로 내가 하고 싶어서 그냥 기다리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 기다리면 괴로움이 있고 어려움이 있어요. 고난이 있어요. 그러나 그 고난이 고초가 나를 살찌게 하고 나를 키 크게 하는 하나의 동력, 힘이 된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용우는 바로 님을 기다리는 괴로 그것이 자신을 성장시키는 동력이 된다고 했고 그런 믿음을 실천에 옮기며 살았어요. 그리고 그 믿음을 실호 표현하면서 시집을 낼 때 이 시를 많은 사람이 읽고 자기 생각에 동화되기를 바랬겠죠. 그러나 불행이도 그 시집은 그렇게 많이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에서 자기 뜻이 제대로 전달 안 되니까 소설을 썼어요. 한용우는 소설을 썼다는 건 아는 사람이 들었는데 소설 여러 편을 썼습니다. 그 중에 흑풍, 검은 바람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조선일보의 1년 가까이 연재했습니다. 이 나라는 중국 청나라 말기가 배경이에요. 그러니까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 배경을 그리고 인물을 20년 전에 청나라로 설정을 했습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 저 옛날에 중국 청나라에서 얘기다. 이렇게 돌려들 수 있죠. 그런데 주인공은 혁명의식을 가진 왕한이라는 인물. 그의 애인인 창순 이 두 사람인데 이 두 사람이 나라를 구하려는 정신. 사회를 변역하려는 의지. 이런 걸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한 파란 만장한 인생사가 펼쳐집니다.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도 나오고 노동자와 비밀분들의 비참한 삶도 나오고 이런 걸 통해서 혁명적 저항의식, 민족의식을 담아냈어요. 그게 소설이 쭉 진행돼서 끝부분에 가면 왕한이 창순하고 결혼을 해요. 결혼을 하니까 창순에 대한 사랑을 더 완성시키기 위해서 지금까지 해온 혁명 사업은 끝이 안 보인다. 그러니까 창순에게 사랑을 받치려는 생각을 하면서 혁명을 버리려고 해요. 그랬더니 그 안에 창순이 남편의 혁명 의지를 고추시키기 위해서 사살을 합니다. 당신이 혁명과가 될 인물인 줄 알고 사랑하고 결혼했는데 혁명의 의지를 포기한다면 난 살 가치가 없다. 혁명의 성공하는 인물이 되기를 바란다. 말을 남기고 몸을 버립니다. 그러자 왕한이 고기 충격을 받고 다시 혁명 의지를 되찾고 혁명의 길로 떠나는 것이 마지막이에요. 이 소설은 혁명이 주제입니다. 혁명, 흑풍. 그 당시의 공산주의는 붉은색으로 표현해서 적풍이라고 했고 아나키즘, 부정부주의는 되게 흑색으로 표현했는데 한용훈 선생이 혹시 아나키즘의 사상을 좀 관심을 가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제목을 보면 여하튼 혁명을 주재료한 이 소설이 어떻게 검녀를 통과할 수 있었냐. 우선은 청나라 말기가 배경이고 그 다음에 정치적 사건 말고 여러 가지 잡다한 사건이 펼쳐집니다. 그래서 소사구자가 좀 산만해요. 이 얘기했다, 저 얘기했다, 남녀의 사랑이 나오고 거기 어떤 여자는 사악한 부자하고 일부러 결혼을 해서 그 부자의 돈을 혁명자금으로 운반함으로서 자기 목적을 다하기도 하는 그래서 부자와의 관계가 아주 여러 차례 연재가 되고 그러는데 이렇게 작품 구성을 산만하게 한 것도 일제의 검녀를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이런 소설을 한용훈 선생님이 또 썼어요. 그다음에 이제 시문. 시문은 1901년생입니다. 이분도 3일운동에 가담을 했는데 그때 경성제1고보 학생이었어요. 경성제1고보는 국내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가는 요즘 말로 하면 인류 대학이었죠. 그래서 경성제1고보는 일본인 반, 조선인 반 이렇게 다녔어요. 그런데 3일운동에 가담을 하니까 퇴악 조치가 내립니다. 학교에서 퇴악당하니까 중국으로 유학을 갔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의 소개로 북경에 가서 우당 이외영 선생님, 이외영 선생님 집에서 2개월간을 머물렀어요. 금서우당선생에게 저는 연극봉부를 하고 싶어서 불난서 같은 대로 유학 가고 싶다고 했더니 우당선생께서 말씀할 수 있기를 그러면 안 된다. 너는 외교가 될 소질이 있으니 어하게 정지나라 이렇게 당부하셨다는 겁니다. 이걸 자기의 회고담으로 써서 남겼어요. 그래서 이제 귀국한 다음에 신문사 기자하고 영화에도 좀 관계를 하고 연극운동도 하고 그러다가 1930년 10월 29일부터 조선일부의 장편소술 동방의 애인을 연지합니다. 그런데 검열에 걸려서 중단되고 말아요. 다시 또 장편소술을 써서 불사조라는 작품을 연지하는데 이것도 검열에 걸려서 중단됩니다. 소설 두편이 연재 중단이 되니까 시집을 내자. 시집 출판 신청을 했는데 이것도 검열에 걸려서 발관할 수가 없었어요. 그 시집에 들어있는 요명한 작품이 바로 신문의 그 날이 오면입니다. 그 날이라는 건 조국 광복의 날이겠죠. 조국 광복의 날이 오면 삼각산도 춤추고 한각물도 용서 춤추고 자신은 너무 기뻐서 종너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서 두개골에 산산 조각이 나서 깨져도 기뻐서 죽는데 무슨 한이 남겠느냐. 참 이런 검열한 실을 썼어요. 또 거기서 더 나가 가지고 아주 자학적으로 잘 드는 칼로 자기 몸에 가족을 벗겨서 북을 만들어서 여러분의 행렬의 앞장을 써서 렁찬 고함소리를 지르겠다. 죽어도 한이 없다. 이런 엄청난 실을 썼습니다. 이런 실이 들어있는 시집이니까 그 시집이 발관될 리가 없죠. 여기서 그 날이라는 당연히 조국 해방의 날을 의미하죠. 삼각선이 춤을 추고 한각물이 용서선치는 황홀한 장면을 표현했어요. 감격에 극한해서 종너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죽는 극단적 장면까지도 상상을 했고 자신의 가족을 벗겨 북을 만들어서 행자로의 앞장 서서 나가겠다. 이런 자학적인 상상까지도 했습니다. 이런 상상을 한 것은 바로 우리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의지가 소산할 때 우리가 바라는 해방의 그날이 올 수 있다는 그런 신념을 표현한 것이죠. 그래서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교 교수 세실바우라가 시와 정치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 어떻게 이 시문의 실을 구해서 영어로 번역을 했어요. 그러면서 아무리 가혹한 일본의 한국 통치도 그 민족의 신은 죽이지 못했다 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렇게 이제 연재소설도 중단이 되고 또 시집도 못 내니까 당진으로 이주해요. 당진의 이주에서 다시 또 집휴일에 전념해 가지고 1933년에 영원의 미소 그다음에 34년에 증여성을 또 신문에 연재하는데 이 두 작품은 검녈에 걸리지 않았어요. 끝까지 연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요령을 터득한 거죠. 어떻게 하면 검녈에 안 걸리나. 그래서 1935년에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의 상농수가 당선이 됩니다. 상농수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박동혁과 최영신이라는 두 인물의 농촌 개몽 활동을 다룬 건데 이 두 인물은 그 당시에 실존 인물이었어요. 그래서 실존 인물의 삶을 바탕으로 해서 거기에 살을 붙여서 소설을 맞는 거죠. 그런데 이 박동혁과 최영신은 방향이 좀 다릅니다. 박동혁은 조선 농민의 잠재적인 힘을 높이는 이념의 통일과 적극적인 실천을 주장한 데 비해서 최영신은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온건한 농민 개몽 사업. 주로 한글 학습, 한글 공용화 사업 같은 그런 봉사 활동에 헌신을 했어요. 그런데 그러다가 병사하게 됩니다. 박동혁은 최영신하고 결혼할 생각도 했는데 최영신이 죽자 거기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개몽 의지를 더욱 다지면서 적극적인 농촌 운동을 결심합니다. 소설은 이곳으로 끝나요. 그래서 주제는 맨끝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적극적인 농촌 운동. 그다음에 이 사건 전개의 여러 과정에 일제의 억압 양상을 개입시켜서 정황식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 농촌 현실에 대한 비판도 여러 곳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작품 전체는 건전한 농촌 개몽 운동 과정으로 그려져 있어서 검녈에 통과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다음에 이욱사의 조항시. 이욱사의 삶은 독특합니다. 1904년에 출생을 해서 1925년, 어린아이로 22살 때 이미 대구에서 비밀 결사를 조직했어요. 그리고 27년에 조선인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열루되어서 투옥된 이후 1944년 1월 16일 북경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거기 북경에서 떠날 때까지 16차례 이상의 옥골을 치뤘어요. 그러니까 독립운동 기간이 한 16년인데 16년 동안 16번 이상 옥골을 치뤘으니까 거의 매년 경찰서에 불려간 거죠. 그래서 그 일생은 청춘 시절로부터 죽음의 그날까지 끊임없는 체포와 투옥과 고문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1944년 7월에 서울서 체포돼서 북경으로 압성되어가지고 북경에서 취조를 받다가 일제 고문에 의해서 희생됐습니다. 이 분은 정식 재판 받고 실형으로 선고받은 적이 없어요. 다 끝까지 고문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증거 불충분으로 나올 수 있었던 거죠. 그렇지만 고무들로 몸은 만신창이가 됐고 마지막 체포 당시에 심한 고문으로 취조실에서 죽었으니까 이 분은 고문으로 희생당한 독립운동 갑니다. 독립운동의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발표된 시작품은 많지 않아요. 그런데 이 분의 시작품을 시기순으로 읽으면 정신과 의식의 변화 과정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국사의 총포도, 유명한 작품이죠. 내고장 7월은 총포도가 이거 간다. 총포도에는 이 마을의 전설이 다 담기고 또 먼 하늘도 들어와 박힌다. 말하자면 그 마을의 시간적인 것, 또 공간적인 것, 삶의 모든 것이 총포도에 들어와 박힌다. 그래서 흰 돗담배가 고업게 밀려서 오면 거기 우리가 바라는 손님이 타고 오는데 그 손님은 푸른 도포를 입고 깨끗한 옷을 입고 오지만 고달픈 몸으로 찾아온다고 했어요. 어떻게 조국 광복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손님이 고달픈 몸으로 오느냐. 여기에 이국사의 행동으로 산 독립운동가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조국의 광복은 편안한 몸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독립운동가들의 고달픈 자기이생, 그 권한의 연속 속에서 비로소 우리에게 행복의 날이 올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우리에게 광복의 기쁨을 안겨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올 수밖에 없는 것이죠. 행동으로 저항한 사람이 아니면 이런 실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 포도를 따먹으면서 두 손을 한복 적셔도 좋겠다. 우리 식탁에는 깨끗한 은쟁반과 하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둬. 정결한 마음과짐으로, 손결한 마음과짐으로 미래의 이상 세계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국사의 미래지향성, 그 다음에 현실의 고난, 이런 것을 함께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 시는 절정이라는 시입니다. 아까 총포도 발표한 몇 달 후에 발표한 건데 상당히 상황이 더 안 좋아졌어요. 매운 계절에 체직에 쫓겨 가지고 위기적으로 휩쓸려갔고 하늘이 다 지쳐버린 높은 지점에 섰는데 서리빨이 칼날처럼 서 있고 무릎 꿇고 쉬고 싶지만 한 발 작게 내딛을 꽃조차 없는 그런 위기의 상황, 절망의 상황입니다. 위기의 절정이에요. 이런 가운데에서 내가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생각으로 이 겨울을 바꿔야겠다. 그래서 얻어낸 게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인가보다 라는 생각입니다. 현실의 어갑이 가중되어서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어요. 서리빨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도다 있고 한 발 제기어뛰질 수도 없는 그런 절박한 상황입니다. 이런 절망과 고통의 절정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눈을 감고 생각해보는 거지. 내면의 사색을 통해 현실을 좀 바꿔보는 겁니다. 그래서 얻어진 게 강철로 된 무지개. 이국사 시에서 무지개는 여러 편의 시에 나오는데 되게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넘어가게 해주는 무지개. 그러니까 이국사는 겨울, 자기가 처한 암담한 현실. 이것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다른 세계로 나를 넘어가게 하는 무지개가 다리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에요. 무지개는 고통의 절정에서 다른 세계로 나를 넘어가게 해주는 매괴물이다. 그래서 겨울, 암담한 현실, 고통스러운 현실을 무지개 다리를 터보소 넘어가겠다. 이런 내면의 의지가 이 시에 표현됐습니다. 그런데 그 무지개는 일곱 빌깔 아름다운 무지개일 수는 없죠. 겨울이라는 암담한 상황의 비우기 때문에 강철로 된 무지개, 강철처럼 차갑고 딱딱한 시커먼 그런 무지개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이국사의 의지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 절정을 발표하고 또 몇 달 지나서 교목이라는 실을 발표했습니다. 교목. 교목이라는 것은 높은 나무에요. 높은 나무. 이 높은 나무는 세골에 불타고 우뚱 남아서 있는데 그 커다란 나무에 꽃이 화려하게 피는 법은 없죠. 봄이 되면 개날에 진달래 작은 나무들이 꽃을 피우지 커다란 교목이 꽃을 피우는 일은 없습니다. 외적인 화려함을 거부하는 강인한 정신자세를 나타내기 위해서 차라리 봄도 꼽히지 말아라. 그리고 어떤 상황이 와도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리 뉘우치지 않겠다. 세 번째 연에서는 죽음을 영상합니다. 죽음. 검은거림자. 쓸쓸하게 호수 속 깊이 거꾸로 진다. 이건 죽음의 장면이죠. 그렇게 죽음이 나에게 다가와도 참아 바람도 흔들지 못해라. 나의 마음. 나의 의지. 이것은 바람도 흔들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어떠한 실현에도 뉘우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그런 정신자 사세를 견제하겠다는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이후에는 이제 시발표가 거의 없어요. 우선 한글로 씨를 발표 못하게 했고 그다음에 이욱사도 발표할 어떤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44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니까 해방된 다음에 해방된 다음에 유족들이 그 유작을 모아서 자유신문의 몇 편 발표했어요. 그중에 한 편이 광의합니다. 그래서 더 넓은 광야가 있는데 이 광야의 태초에 처음으로 세계가 열렸어요. 천지가 개별을 했습니다. 모든 산맥들이 생겨났는데 더 넓은 광야는 침범하지 못했다. 그 신성한 광야가 유지됐는데 또 올해는 세월이 지나서 역사의 강물이 길을 열어서 민족 역사가 시작이 되었다.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현재는 겨울이라 눈 내리는 암담한 상황이에요. 그런데 어디선가 매화향기가 풍교옵니다. 매화향기는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꺾이지 않는 독립정기, 민족정기를 상징하겠죠. 그런 민족의 정기가 그래도 나에게 전해오니까 나는 여기 노래의 씨를 관한하지만 그래도 씨앗으로 남아있는 노래의 씨를 뿌린다. 이 앗을 뿌리면 그 씨앗은 언젠가 싹 토서 자라 가지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열맥 있는 그날을 천구에 뒤라고 했어요. 천구, 천연의 세월, 아득한 세월이 흐른 다음에 백맡하고 오는 초인에 있어 이 광야에서 목록이 하리라. 그러면 이상세계가 우리에게 오는데 어쩌서 아득한 세월 뒤에 온다고 했느냐. 이 욕사는 항일 독립운동을 펼치면서 조국의 광복이 그리고 조국의 이상세계가 그렇게 쉽게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 같아요. 자기의 종말도 다가오고 자기의 힘도 지쳐가고 그러니까 아득한 후세의 이상세계가 올 것이라고 상정하고 미래를 위해서 노래의 시앗을 뿌린 것입니다. 시앗은 언젠간 싹이 토서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것이 백년, 200년 후가 아니라 천 년 뒤로 하더라도 나는 오늘 노래의 시앗을 뿌린다. 참 장허만 생각입니다. 십년, 20년 후에 좋은 세상에 온다. 그럼 오늘 고통을 견딜 수 있어요. 그러나 100년, 200년도 아니고 천 년 뒤에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다. 그 세상을 위해서 너는 오늘 노력하겠느냐 하겠다는 거죠. 오늘 가난한 노래의 시앗을 뿌린다. 천 년 뒤에 이상적인 세계가 온다 하더라도 나는 그 날을 위해 노래의 시앗을 뿌린다. 이런 생각을 담아냈습니다. 참으로 일제 강점기 저항시에 한 전봄이다. 역시 행동으로 독립운동을 한 분위기 때문에 시에서도 저항시에 전봄을 보여주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윤동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윤동주는 참 생각하면 좀 불쌍한, 불행한 삶을 살았어요. 물론 앞에 이욱사도 그렇고 시문도 그렇지만 시문은 그 아까 상록수를 발표한 다음에 1936년에 장티부수가 걸려서 그만 죽었어요. 그분은 병사했습니다. 이욱사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고문사를 당했고 윤동주는 옥사를 했죠. 옥 중에서 죽었습니다. 이분은 1917년 12월 30일 생이에요. 나이를 얘기할 때 조금 곤란해요. 12월 30일 생이니까 1918년 1월이 되면 우리 나이로 벌써 2살이에요. 윤동주가 몇 살에 죽었느냐 25, 26, 27 이런 여러 살이 있는 건 그 출생 연월일 때문입니다. 여하튼 1917년 12월에 출생해서 서울의 연의 전문을 마치고 일본의 도시자대학에 유학을 갔어요. 그 유학가 가지고 한 1년쯤 지나서 1943년 7월에 귀국하려고 배를 타려고 나갔는데 시모노셋게 항에서 체포됐습니다. 그래서 조선 독립을 선동했다. 이런 제목으로 그 고정 사춘형인 송목규와 함께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어요. 그때 함께 체포되었던 조선인 학생들 나머지는 5방위됐는데 송목규와 윤동주만 실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분명한 조선 독립운동의 혐의가 발견됐던 거죠. 그래서 복역하다가 45년 2월 16일 새벽 이마디 소리를 지르고 죽었다. 이렇게 간수가 보고 했어요. 윤동주는 앞에 이욱사와는 달리 항일 독립운동의 행적은 없습니다. 창작 노트에 써놓은 시 얘도 저항의식을 직접 드러낸 작품은 거의 없어요. 그런데 그의 시에는 현실의 억압에 괴로워하면서 순결한 영혼을 지키려고 했은 행적 지식인의 고뇌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제목을 윤동주의 내성적 저항시다. 행동으로 저항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저항했다. 이런 뜻이죠. 자기의 의식을 행동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나약함 자신의 나약함을 부끄러워하면서 그 심정을 정직하게 시로 표현했어요. 숨김없이 나는 참 부끄러운 존재다. 욕된 존재다. 그렇게 얘기하기가 참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윤동주는 행동으로 저항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뇌하는 영혼으로, 양심으로 저항을 했다. 이렇게 봅니다. 이것은 윤동주의 십자가인데 윤동주는 실을 쓰고서 꼭 거기 자기가 실을 쓴 날짜를 밝혔어요. 이 실은 1941년 5월 30일에 쓴 십니다. 일기를 쓰듯이 실을 썼어요. 이 실을 보면 교회당 꼭대기에 십자가 걸렸는데 십자가 너무 높아서 거기까지 올라갈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십자가에서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으니까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이에 수처럼 나에게 십자가 거락된다면 죽겠다는 거예요. 피를 조용히 열리겠다. 이런 실을 썼어요. 그런데 이 시의 전반부를 보면 나약하고 망설이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첨탑이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겠나. 휘파람 불며 서성거리는 모습 뭘 보여주었죠. 근데 후반부에 가면 갑자기 다른 생각이 나타납니다. 십자가 거락된다면 의연하게 죽겠다.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이 장면은 순고한, 순교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망설이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던 내가 이런 거룩한 순교의 자세를 취하느냐 조금 이해가 안 돼요. 그런데 이 부분도 가만히 보면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피를 흘리겠다고 했으니까 이건 어두운 하강의 심상입니다. 십자가를 향해 올라가지 못하고 서성이던 그 나약한 자의 모습이 자기도 모르게 여기 투영이 되어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나약한 자기지만 윤동주는 시적인 상상 속에서 자기 한 몸을 희생해서 참 민족의 구원이 올 순 없을까 그렇게 소망을 하면서 십자가를 썼습니다. 그 시는 1941년이니까 윤동주가 연의 전문 다니던 4학년 1학기에 썼어요. 그래서 여름방학에 고향에도 갔다 오고 그래서 여러 가지 생각도 하다가 학기 말이 되니까 이제 유학을 갈 생각을 합니다. 윤동주는 4학년 말이 되니까 이제 유학 갈 생각을 해요. 송목유하고 41년 12월에 태평양전쟁이 터져서 졸업이 앞당겨집니다. 졸업이 그때는 3월 말인데 말로 졸업했어요. 갑자기 졸업이 앞당겨지니까 고정사천인 송목유하고 윤동주는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일본 유학을 갈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일본 유학을 가려고 했더니 조선식 이름, 한국식 이름이면 증명서를 안 해줘요. 그러니까 창식 해명이라는 제도가 1939년에 시행이 돼 가지고 그동안 1년간 접수를 받았어요. 한 한국인 80%가 창식 해명을 했는데 윤동주와 송목유는 창식 해명하지 않고 남아 있었는데 일본으로 유학갈라면 현에 탄 배를 탈 수 있는 도항 증명서를 받아야 하는데 그 도항 증명서는 일본식 이름을 가진 사람 창식 해명을 안 사람 이래야 발급해줬어요. 그래서 우리가 일본 유학을 가려면 이름을, 성을 일본식으로 바꿔야 된다 해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윤동주는 평소동주라는 성으로 개명을 해서 교무커에 신고합니다. 그 신고한 날짜가 1942년 1월 29일이에요. 그러니까 이 신은 창식 해명 신고를 하기 5일 전에 고민하면서 그 배경을 알아야 됩니다. 이 얘기는 송우혜 씨가 윤동주 평전에 자세히 밝혔습니다. 그래서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있는데 이 얼굴은 참 욕되다. 너는 윤동주냐 평소동주냐 네 정체가 뭐냐 참 취욕스럽다 이거죠. 24년 1기월을 아무 기쁘 없이 살아왔고 그냥 모래나 즐거운 날에 광복의 그날이 온다면 나는 또 한 줄의 참 매력을 써야 돼요. 부끄럽게 일본식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을 해서 신고를 했으니까 그 부끄러움을 견딜 수가 없어요. 또 참 매력을 써야 된다. 이런 데서 윤동주의 정직함이 드러납니다. 자기의 참된 모습을 알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합니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자기 거울을 닦아요. 그랬더니 자기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그 모습은 밝고 화난 모습이 아니라 어느 시커먼 운성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습이에요. 일본 유학을 앞두고 청원의 꿈을 꾼 게 아니라 자기가 몰락해가고 침전해가는 어두운 모습을 발견했어요. 어쩌면 윤동주의 운명을 보았는지도 모르죠. 죽음의 그림자를 본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운명의 모습을 본 날짜가 1942년 1월 24일 윤동주는 계획대로 일본 유학을 갑니다. 그래서 도시가 대학으로 바로 가지 못하고 동경에 있는 리케대학 영무과 바로 우선 입학을 합니다. 그 리케대학 영무과에서 영무과 다닐 때 쓴 시가 이제 다음에 있습니다. 이 시는 리케대학 일학기를 다니던 42년 6월 3일에 쓴 시입니다. 이 시는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6개 다닐을 깐 작은 아수방은 내 나라가 아닌 일본이다. 이렇게 선언하고 있어요. 육첩방은 남의 나라는 걸 두 번이나 얘기했어요. 그리고서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마지막 나다.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내가 두 개로 분열돼 있는데 그 두 개가 최초로 악수를 나눈다 이렇게 시가 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동경 리케대학 영무과에 다니고 있던 일학기 초여름 비오는 밤에 쓴 시인데 그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이 시가 그럼 어떻게 남아서 우리에게 전달이 되느냐 윤동주가 체포될 때 가지고 있던 모든 문어는 다 압수가 됐어요. 그런데 이 시는 서울에 있는 친구 강초중에게 보내는 편지에 동봉을 해서 그 친구가 보관했다가 해방 후 유족에게 주어서 남아있게 됐습니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는 말은 참 혁명적인 발언이에요.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동화 공영권 내선 일체를 내세우던 전시체제 1937년에 중일 전쟁 1941년에 태평령 전쟁 살벌한 전시체제로 접어든 일본에서 그 일본의 수도인 동경하숙방에서 내가 있는 이 땅 일본은 절대 내 나라가 될 수 없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명했는데 이 말 만으로도 윤동주는 2년의 실형을 사실은 선고받을만 한 겁니다. 이렇게 생각을 나타낸 다음에 뒤에 가면 그때까지 분열을 보여온 그의 자아. 내가 둘로 나눠져 있었는데 이 자아가 화합을 이룹니다. 그래서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약속. 제일 처음으로 두 개의 나라 하나로 통합되었다. 그 통합된 나는 어떤 역할을 하느냐 새로운 시대를 기다리는 나예요. 등부를 밝혀 어둠을 조금 내물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이 새로운 시대를 기다리는 나의 모습은 자신의 마지막 단계기 때문에 최후의 나라고 표현했습니다. 갈등을 일으키던 두 개의 자아가 하나가 되면서 윤동주는 비로소 오롯한 한 사람의 민족 시인으로 서게 됩니다. 이것이 윤동주가 우리에게 보여준 마지막 모습이에요. 그 후에 시도 쓰고 일기도 썼을 텐데 그 문건들은 체포되면서 다 압수당에서 재판에 증거 자료로 사용됐어요. 공판 자료는 남아있지만 그 증거 자료는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래서 윤동주의 그 후의 모습뿐 알 수가 없지만 마지막 작품을 통해서 민족 앞에, 역사 앞에 떳떳하고서 했던 갈등하던 두 개의 나가 하나로 통합된 윤동주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윤동주는 조항 시인에 합당한 그런 작품을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보여준 게 된 것이죠. 여기까지 좀 시대를 건더 뛰면서 어떻게 보면 주마 간산격으로 몇 개의 소설과 시인들을 다뤄본 셈인데 그래도 일제 강점기 조항문학에 의미가 뚜렷한 작품들은 한 번씩도 살펴봤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